최상현 주필

 
통일 강국은 우리의 꿈이다. 북의 체제는 빠르게 형해(形骸)화가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지금 하는 것으로 볼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의 왕건에게 바쳤듯이 그렇게 북한 정권의 명운을 어디에 헌납해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느 날이든지 머지않아 그 체제는 갑자기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날이 바로 운명적인 민족 통일의 날이 아닌가. 그 날을 생각하면 절로 두근거리는 설렘과 함께 까닭 모를 두려움 같은 것이 이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잠자다 깨어나는 잘 다독여지지 않는 흥분이다. 통일은 멀지 않다. 그것이 열린사회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많은 국민들의 직관이며 그것은 별반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heph toynbee, 1889-1975)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으로 규정했다. 한국이 통일 강국으로 가는 길에는 토인비가 말하는 것과 같은 헤치고 넘어야 할 험난한 도전들이 많다. 그 도전적 과제들에 우리는 적절히 응전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해내야 한다. 거기에 통일 강국의 꿈을 이루고 못 이루고가 달려 있다.

이집트의 나일 강, 중국의 황하, 인도의 인더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에서 일어난 인류의 ‘대하(大河) 문명’은 강의 범람이라는 도전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같은 도전이 응전을 유발해 도리어 강 연안을 기름진 옥토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기에 고대 문명의 발생이 가능했다. 이같이 우리도 통일 강국으로 가는 도상에서 직면하는 도전들을 적절히 대응해 극복하고 새로운 운명, 새로운 역사, 통일 강국의 대망을 현실로 이루어내야 한다. 산이 있기에 산에 가는 것처럼 도전이 있으므로 본능적인 응전으로 우리는 통일로 가야 하는 것이다.

통일 강국의 목표점에 다가갈수록 우리는 막연하게 느껴지던 주변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4강의 존재감을 태산준령과 같은 설득하고 넘어야 할 도전 세력으로 실감하게 된다. 더 말할 것 없이 우리의 총력적인 대응과 응전을 촉발하는 외교 안보적 측면의 도전이다.

바로 지금이 이 같은 도전에 대한 대응과 응전의 노력을 한층 더 밀도 있게 기울여 나가야 할 때다. 도전적인 주변 분위기에 주뼛거릴 것이 아니라 끈질김을 가지고 그들에게 우리가 통일 한국의 꿈을 이루어내야 하는 당위성을 당당하게 설파해나가야 한다.

통일 한국의 비전을 제시하고 통일 한국과 함께하는 미래가 그들의 국익에 결코 불이익이나 위해가 되지 않으며 도리어 실익이 클 것임을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내야 할 것이다. 역시나 통일 한국이 등장하는 날, 동북아와 세계는 더욱 평화로질 수 있고 국가 간의 질서는 더욱 안전하게 변화될 수 있는 상황적 논리를 동원해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통일은 이렇게 도전적인 과제에 대한 우리의 치열하고 적절한 대응과 응전이 있어야 이루어낼 수 있는 꿈이다.

그렇지만 힘이 없으면 4강을 상대로 우리의 주장을 당당히 펼 수도 그들을 설득할 수도 없다. 힘없는 나라의 주장을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설득은 욕심을 좀 부리자면 그들과 겨루기에 부족하지 않은 국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 같은 국력으로 우리가 통일을 감당할 능력이 충분함을 그들에게 입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린 절반의 땅과 형제들을 가꾸고 먹여 살릴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국력은 물질적 토대인 경제력인 동시에 감히 우리를 향해 외부로부터의 대적할 의지를 꺾어 놓을 만한 강력한 안보 역량과 외교 역량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또 있다면 그것은 통일 강국을 지향해 가는 우리 국민의 단합된 의지와 합의이며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통일에 대한 열정이다.

이렇게 우리의 국력이 배경이 되는 힘과 능력, 국민의 일치된 통일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잘 어우러져야 하며 한껏 과시돼야 한다. 그렇게 해서 주변 강국들 모두가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이 그들로서도 도저히 거스르기에 벅찬 대세임을 인정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남북 간의 관계는 내부 문제로서 특수성은 있지만 마찬가지로 월등한 힘을 바탕으로 할 때 안전한 관계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무탈한 동포애적인 융통성과 신축성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통일 강국으로 가는 길에서 이같이 도전에 대한 현명하고 적절한 응전을 견인(牽引)해내며 남북 간에 충돌 없고 희생 없는 부드러운 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 토인비는 문명과 역사 발전을 위해서는 ‘창조적인 소수자(Creative minority)’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토인비가 말하는 ‘창조적인 소수자’는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험난한 길을 안전하게 탈출하게 한 희생정신과 용기를 가진 모세(Moses)와 같은 지도자를 지칭한다. 이 같은 ‘창조적인 소수자’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가 일상 보는 것은 토인비가 문명의 쇠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 ‘지배적 소수자(Dominant minority)’가 되고자 하는 앞뒤 안 가리는 권력 싸움뿐이지 않은가.

마땅히 선거로 뽑히는 소수의 정치 지도자들은 토인비가 말하는 ‘창조적 소수자’를 닮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 ‘창조적 소수자’가 나타나면 대중은 그들을 본받아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단합을 이루며 역사 발전에 진취적으로 헌신한다. 지도자들이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하면 자명하게도 대중 사이에 그 반대의 퇴영적인 현상이 만연한다.

그렇기에 지도자들이 솔선해야 할 마땅한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건강한 역사 발전을 위해 줄기차게 요청돼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반사로 우리 지도자들의 독직 매직 부패 부정 스캔들을 접하고 그 와류(渦流)에 휩싸인다. 하도 그런 일을 많이 겪다 보니 이 망국(亡國)의 위험천만한 비리에 무심해지고 무디어질 지경이다. 통일의 길목에서 도전적인 과제는 밀려와 쌓이는데 도대체 어쩌자고 우리는 이러는 것인가 참으로 복잡한 소회를 억누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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