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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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제는 48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창업군주로서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지만, 만년에는 지나친 관대함과 불교숭상으로 국가기강을 무너뜨렸다. 수도 건강(建康)에는 5백여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전체 호구의 반이 조세와 부역의 면제대상인 승려나 도사들이었다. 부패와 사치가 만연했지만, 양무제의 북벌은 계속됐다. 그러나 북위가 동서로 분열되는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누군가 투항하기만 기다렸다. 547년, 동위의 후경(侯景)이 권신 고징(高澄)과 갈등으로 반란을 일으키려고 양무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대부분 타국의 분쟁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으나,과대망상에 걸린 양무제는 후경을 이용해 중원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후경과 양무제의 군대는 대패했다. 후경은 도망쳐오자, 양무제는 그를 남예주목(南豫州牧), 하남왕으로 봉했다. 후경은 병력과 군량을 모아 자립할 야망을 품었다. 그러나 양무제는 그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노년의 양무제는 만사가 귀찮았다. 동위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자, 후경은 역양(歷陽)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밀(王密)의 경고를 받고도 양무제는 무시했다. 왕밀이 후경을 토벌하겠다고 자청했지만, 양무제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후경은 남양의 장군 양아인(羊鴉仁)을 끌어들이려다가 거절당하자 이렇게 요구했다. “신이 진짜 모반했다면 국법에 따라 다스리시고, 사실이 아니면 양아인을 죽여서 사과하십시오. 고징은 신과 폐하를 이간하고 있으니 믿지 마십시오. 그의 간계에 넘어가 동위와 화친을 맺는다면 신은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이 어떻게 고징과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폐하를 떠나겠습니까? 강서를 신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겠습니다. 조정으로서는 치욕이고, 신하들에게는 고민거리일 것입니다.”

양무제는 후경을 달랬다. “가난한 집에서 어찌 많은 손님을 맞이하겠는가? 짐에게는 그대가 유일한 손님이다. 그대를 불러놓고 정중하게 대접하지 않은 것은 나의 잘못이다.”

협박에 가까운 말을 듣고도 양무제는 후경에게 더욱 많은 상을 하사했다. 과대망상증에 걸린 양무제는 많은 병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나운 늑대를 방으로 끌어들인 셈이었다. 후경이 모반했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그는 적극적인 대책을 수립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584년, 후경은 간신 주이(朱異), 솔육험(率陸驗), 주석진(周石珍)을 죽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수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진상을 모르던 백성들만 고생했다. 후경을 막으라고 임명한 양무제의 조카 소정덕(蕭定德)은 냉큼 성문을 열어주었다.

대성(臺城)을 지키던 양간(羊侃)은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하자 후경은 소정덕을 황제로 옹립하고 스스로 승상이 됐다. 549년. 각지의 원군이 도착하자 후경은 거짓으로 화의를 요청했다. 나중에 후경은 소정덕을 폐하고 스스로 대승상이 돼 권력을 전횡했다. 양무제는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지만 종친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자기들끼리 싸웠다. 형주자사였던 양무제의 아들 소역(蕭繹)은 후경을 토벌한다고 떠들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면서 출전하지 않았다.

대신 사이가 나빴던 조카 소예(蕭譽)를 쳤다. 소예는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있던 아우와 연합해 소역의 근거지 강릉을 공격했다. 실패하자 적국인 서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서위가 강릉을 압박하자 다급해진 소역은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서위와 강화했다. 그 와중에서도 소역은 소예를 죽였다. 후경은 간문제 소강(蕭綱)을 죽이고, 양무제의 증손 소동(蕭棟)을 옹립했다가 다시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한(漢)이라 정했다. 소역이 진패선(陳覇先)과 연합해 후경을 토벌했다. 며칠 동안 황제였던 후경은 바다로 도망쳤다가 피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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