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동시 개막
첫 대규모 전시… 21일부터 일반에 공개
“전 국민의 관심 높아, 한 달 예약 ‘매진’”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드디어 ‘국민 품으로’ 돌아왔다. 느지막이 노후를 즐기던 겸재 정선이 그린 비 내린 후의 인왕산을, 307번을 찍어 만들어낸 김환기의 작품을, 교과서에서나 봤던 이중섭의 ‘황소’를 직접 볼 수 있게 됐다.
20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언론공개회가 진행됐다. 여지껏 이건희 컬렉션 중 몇몇 작품이 공개된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대규모로 공개되는 전시는 처음이다. 오는 21일부터 일반에 공개되는 두 특별전은 지난 4월 고(故) 이건희 삼성회장의 유족측이 기증했던 작품들 중 ‘명품’이라 일컬어지는 것들로 작지만 알차게 채웠다.
◆ 고전의 걸작 77점, 인왕제색도·천수관음보살도
국립중앙박물관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이라는 이름으로 45건 77점(국보·보물 28건 포함)을 공개했다. 특별전시관은 이미 2~3년 전부터 가득 차 있어서 상설전시관 중 ‘서화Ⅱ실’을 활용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가 이렇게 관심이 많을지 정말 예상을 못했다. 정말 폭발적인 관심”이라며 “월요일 00시(자정)에 예약 사이트를 오픈해서 한 달씩 예약이 이뤄지도록 했는데 이미 다 매진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전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은 시기와 분야를 모두 아우르고 있어 더욱 시선을 끈다.
사실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4월 이 회장의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물품은 9797건 2만 1600여점이다. 유례없는 대규모의 기증품은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금속, 도토기, 전적, 서화, 목가구 등 폭넓고 다양하다. 박물관 은 시대와 분야를 대표하는 것들로 꼽아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전시실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한 영상을 먼저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다. 그렇기에 박물관 측에서 이번에 특별히 제작한 이 영상에는 겸재 정선이 느꼈던 비 그친 후 ‘인왕산’의 모습을 담았다. 천천히 흘러가는 영상을 보고 있으면 바쁜 현대인의 삶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느끼면서 작품을 더욱 주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영상을 보고 전시관을 들어서면 화려한 작품들이 가장 먼저 맞이한다. 검은빛이 도는 짙은 푸른색을 물들인 고급 감지에 화려한 금으로 그린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은 고려시대의 깊은 불심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화려한 사경을 지나가면 삼국~고려시대의 금동불과 불교공계 등 불교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이어 이번 전시의 정점을 찍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가 등장한다. 노년에 풍요로웠던 정선의 시선에서 바라본 비에 젖은 인왕산은 정선의 섬세하고도 힘찬 필선들로 오롯이 표현돼 있다. 반면에 그 옆에 자리 잡은 ‘추성부도’는 단원이 죽기 직전에 그린 작품으로 쓸쓸한 노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두 작가가 말년에 그린 두 작품을 나란히 보고 있노라면 두 작가의 전혀 달랐던 삶을 느낄 수 있다.
거기에 이 회장이 해외에서 회수한 고려불화 두 점도 만날 수 있다. 비단에 그린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와 ‘수월관음도’는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워 적외선과 X선으로 촬영한 사진을 터치 스크린 영상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벽면을 가득 차지한 10폭의 십장생도는 화려한 맛을 더한다.
이 외에도 초기 철기시대의 권력을 상징하는 ‘청동방울(국보 제255호)’과 화려한 칼 손잡이 장식을 통해 이 회장이 생전 얼마나 다양한 곳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글에 관심이 많았던 이 회장이 모은 ‘석보상절 권11(보물 제523-3호)’, ‘월인석보 권11·12(보물 제935호)’, ‘월인석보 권17·18’ 등을 통해 한자와 한글을 모두 사용해야 했던 조선시대의 슬기로운 편집 형식까지 눈으로 볼 수 있다.
◆ 김환기·박수근·이중섭 근현대 화가 총출동
국립현대미술관은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이라고 전시를 열었다. 기증받은 1488점 중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34명의 주요작품 58점을 선보인다.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이응노 등의 작품을 대거 볼 수 있다.
여태껏 국립현대미술관은 한정된 예산으로 운영하면서 꾸준히 작품 수집을 했지만 이번 이 회장측의 기증으로 1만점을 넘기게 됐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특별전에 대해 “1세기에 두 번 보기 어려운 전시가 아닌가 싶다”며 “이건희 컬렉션의 특징은 동서고금을 망라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객들이 힐링과 치유와 감동과 상상력을 공유하는 전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용과 변화, 개성의 발현, 정착과 모색으로 총 세 개의 주제로 나누어 전시되는 이번 특별전은 20세기 초·중반 대표작들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주제인 ‘수용과 변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은 백남순(1904~1994)의 ‘낙원’과 이상범(1897~1972)의 ‘무릉도원’이다. 두 작품이 제작된 1920~30년대는 서양화의 유화가 국내에 들어와 변화하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비단에 채색한 무릉도원과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낙원을 비교하면서 보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낙원은 해방 이전에 제작된 백남순의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림이다.
이어 두 번째 주제인 ‘개성의 발현’에서는 1945~1950년대 한국전쟁 당시의 그림이 많다. 기증 당시 시선을 끌었던 이중섭의 ‘황소(1950년대)’와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년대)’ 등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황소’는 이중섭이 가장 애호했던 작품 소재 중 하나로 이번 작품은 1976년에 처음 알려진 후 1990년 발간된 이중섭 화집에 수록된 후 거의 전시된 적이 없었기에 더욱 시선을 끈다. 이 외에도 장욱진의 ‘나룻배’와 ‘소녀’도 눈에 띈다. 재미있는 것은 소녀는 1939년의 작품이지만 그 뒤에 그려진 나룻배는 1951년 작품이라는 것이다. 당시 캔버스를 구할 수 없었던 작가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 주제인 ‘정착과 모색’에서는 해외로 직접 나간 작가들이 세계관을 완성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이응노의 ‘구성’과 ‘작품’은 1970년대 문자추상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며 비슷해 보이지만 기법적으로 다르게 표현했다.
이처럼 다양한 시대의 수많은 작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특별전은 서울을 시작으로 지방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은 오는 9월 26일까지 진행되며 국립현대미술관은 내년 3월 13일까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