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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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러·미 정상회담 결과를 보면 양국 관계가 개선될 기미가 보인다. 이번 회담의 주요 의제는 전략적 안정, 사이버 보안, 지역분쟁, 통상관계 그리고 인권 문제였다. 양국은 전략적 안정에 관한 대화를 시작하기로 했으며 그간 양국 관계에 걸림돌로 작용했던 사이버 보안, 간첩 혐의 수감자 교환 등 여러 이슈에 대해 협의하기로 했다. 또한, 올해 4월 본국으로 소환됐던 대사들이 이번 회담 직후 각각 모스크바와 워싱턴으로 복귀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제의로 이루어진 이번 정상회담에 앞서 미국은 러시아와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관계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는데 중국의 패권 도전에 대응하는 데 집중하기 위해 대러 관계를 관리한다는 전략적 고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간 한·러 관계는 상당 부분 러·미 관계에 연동돼 왔다. 2014년 우크라이나 내전 와중에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전격 병합하자 미국과 유럽연합은 즉각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다. 한국은 독자적으로 제재하지는 않았으나 미국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2014년 2월 러시아 소치에서 개최된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다음 대회 개최국 국가원수로서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했는데 박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고, 그 뒤 바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내전과 관련해 러-미 관계가 악화되면서 한·러 관계도 영향을 받았다. 2016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동방경제포럼에 참가할 때까지 양국 간 고위급 교류는 사실상 중단됐다. 경제 측면에서도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경제가 타격을 받아서 한국의 대러 수출 및 투자도 줄어들었다. 특히 미국의 제재에 있어 소위 secondary boycott 경고 때문에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에 대한 신규 투자를 주저하게 됐다. 실제로 2014년 이래 러시아 기업과 추진하려던 프로젝트들이 미국의 secondary boycott를 우려한 국내은행들의 비협조로 무산됐다.

문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 러시아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양국 관계의 분위기가 상당히 고양됐고 문 대통령의 2018년 방러 때는 김대중 대통령 이래 18년 만에 국빈 예우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신북방정책이 표방한 9개 분야 사업과 관련해 양국 간 기술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혁신 플랫폼’의 구축과 연해주 선도개발구역 내 한국공단 추진 등을 제외하고는 괄목할 만한 것이 없다. 한국 기업들이 대체로 러시아 시장에 대해 소극적인 데다 미국의 제재는 한국 기업들을 더욱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물론 한국 기업들의 투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국 간 협력 잠재력과 극동 러시아 개발 참여에 대한 러 측의 기대에 비춰 볼 때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다.

이번 회담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러시아와 수천 마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와 군사력을 추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러시아는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지 않으냐? 러시아는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라고 했는데 이는 일종의 회유로 풀이된다. 확대해석한다면 앞으로 러시아가 미국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에 따라서는 제재를 완화할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리고 이번 회담을 예의주시한 유럽연합도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의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최근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중국 쪽으로 경도되는 것에 대한 서방측의 우려가 깔려 있다. 몇 달 안에 러·미 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그 결과 제재가 해제되기는 어렵겠으나 이번 회담에 대한 양국 정상의 평가가 상당히 긍정적인 점을 고려할 때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그간 중국은 올해 7월 러·중 우호조약 20주년 계기에 푸틴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도록 공을 들여왔는데 푸틴 대통령은 방중 대신에 6월 28일 시진핑 주석과 화상 회담을 했다. 이는 미국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러·미 양국 모두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은 양국 관계의 개선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간 여러 차례 거론됐던 푸틴 대통령의 방한이 이루어지고, 머지않아 러·미 관계의 개선으로 경제제재도 완화돼 한·러 경제협력이 탄력을 받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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