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20일 어린이 성학대 웹캠을 운영한 혐의를 받고 있는 데이비드 티모시 디킨의 집에 아이들의 속옷, 신발, 카메라, 수갑, 끈, 하드 드라이브, 사진첩 등이 놓여 있다. 필리핀 마발라캇에 위치한 디킨의 컴퓨터에는 성행위를 하는 어린 소년 소녀들의 영상과 사진이 담겨 있었다. (출처: 뉴시스)
2017년 4월 20일 어린이 성학대 웹캠을 운영한 혐의를 받고 있는 데이비드 티모시 디킨의 집에 아이들의 속옷, 신발, 카메라, 수갑, 끈, 하드 드라이브, 사진첩 등이 놓여 있다. 필리핀 마발라캇에 위치한 디킨의 컴퓨터에는 성행위를 하는 어린 소년 소녀들의 영상과 사진이 담겨 있었다. (출처: 뉴시스)

세계서 동의 연령 가장 낮아

시간당 아이·女 1명 강간당해

아동 인권 수준 낮아 현행 유지

의원 등 16세 상향 개정 추진

하원 통과했지만 갈길 멀어

[천지일보=이솜 기자] 안토넷 아큐핀핀(23)이 의붓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하기 시작한 나이는 7살이었다.

부모님은 이미 수년간 아큐핀핀을 구타하고 신체적 폭력을 가해왔는데, 의붓아버지는 여기에 성적 학대를 더했다. 아큐핀핀은 “의붓아버지는 내 얼굴에 칼을 대고 신고를 하면 어머니와 오빠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며 “절망적이었다. 나를 아프게 한 건 가족이었기 때문에 나는 갈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10일(현지시간) CNN방송은 필리핀의 아동 성학대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성적 동의 연령을 집중 조명했다.

아큐핀핀 뿐만이 아니다. 필리핀에서는 아동 성학대가 만연하고 있는데 아동 인권 운동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성적 동의 연령’이 이를 돕고 있다고 말한다. 성적 동의 연령은 성관계에 법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나이다.

필리핀의 성적 동의 연령은 12세로, 세계에서 가장 어린 나이다. 운동가들은 이 나이의 어린이들이 성관계 합의를 하기에 너무 어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가해자들은 어린이를 강간하고 위협을 통해 침묵을 강요할 수도 있다. 이처럼 낮은 동의 연령이 필리핀의 성매매와 10대 임신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성자원센터에 따르면 필리핀에서는 53분마다 약 1명의 여성이나 아이가 강간을 당한다.

유니세프와 필리핀 정부 아동복지위원회가 필리핀 어린이와 청소년 3866명을 대상으로 한 2015년 연구에서 약 3.2%가 어린 시절 강간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17% 이상이 성폭력을 경험했는데 이 중에는 사진이나 영상이 찍힌 것도 포함돼 있다.

많은 국회의원들은 현재 성적 동의 연령을 16세로 상향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16세는 미국 대다수를 포함한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표준이다. 한국도 작년 67년 만에 13세였던 동의 연령을 16세로 올렸다.

성적 동의 연령을 16세로 올리는 법안은 작년 12월 필리핀 하원에 압도적으로 통과되면서 큰 진전을 이뤘으나 실제 법 제정까지 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법제화를 위해서는 상원이 초안을 만들어 통과 시키고 상원과 하원이 만나 이견을 협상해야 하며 이후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이 법안에 서명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하원 통과 6개월이 넘었음에도 상원은 아직도 법안 초안을 제출하지 않고 있다. 총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이전까지 완전히 통과되지 않으면 국회의원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 의원들과 운동가들은 내년 5월까지 이 법안이 최종 통과할 수 있도록 마지막 속력을 내고 있다.

◆현행 법안, 피해자가 증거 찾아야

필리핀 운동가들은 1980년대부터 성적 동의 연령을 높이는 법 개정을 추진해왔다.

12세는 1930년 통과된 개정 형법에 명시돼 있다. 형법에 따르면 강간은 여성이 의식을 잃었을 때, 또는 여성이 12세 미만일 때 무력 사용을 통해 성관계를 한 경우 성립된다.

현대적 기준으로 봤을 때 이 나이는 충격적일 정도로 낮은 것 같은데 이는 역사적 태도를 반영한다. 1898년까지 300년 이상 필리핀을 식민지로 통치했던 스페인을 포함한 유럽 전역의 많은 곳에서 초기 법안은 10~12세 사이의 동의 연령을 규정했다.

19세기에 와서 많은 국가들은 이를 13~16세까지 상향했다. 1900년대 초 미국과 영국의 입법자들은 16~18세 사이로 연령 상향을 추진했고 세계 다른 나라들도 선례를 따랐다.

NGO플랜인터내셔털의 셀레나 포티치는 CNN에 이 형벌 법규가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법률들 중 하나라며 “일부 조항들은 수년에 걸쳐 수정됐으나 동의 연령은 아니다. 최저 결혼 연령은 18세이고 계약을 체결하고 투표할 수 있는 연령도 18세다. 그러나 성적인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최소 나이는 12세다”라고 비판했다.

지난 91년간 동의 연령이 변하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유니세프 필리핀의 아동 보호 책임자인 패트리시아 벤베누티는 이에 대해 “아이들의 인지 발달과 같은 개념에 대한 교육과 이해의 부족”을 먼저 꼽았다. 또한 CNN에 따르면 아동 권리 분야는 필리핀에서 상대적으로 새롭고 여성 인권 운동과 같은 다른 사회 운동에 비해 덜 확립됐다.

일부 의원들은 필리핀이 이미 아동학대금지법이 있기 때문에 동의 연령을 변경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1992년에 통과된 이 법은 ‘돈, 이익 또는 기타 대가’를 매개로 한 18세 미만 아동과의 성관계를 불법화 했다. 인신매매금지법은 18세 미만 아동의 성적 착취, 매춘 등을 금지했다. 그러나 현행법은 피해자들에게 성적 착취를 당했음을 증명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친인척에 의한 아동 성학대가 이뤄지는 경우에는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에 소수의 사건만이 법정에 서고 심지어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는 더 적다.

작년 3~5월 필리핀이 코로나19 봉쇄에 들어가면서 정부 사이버범죄수사본부는 인터넷 업체들과 미국 비영리 단체들과 함께 28만건의 아동 성착취 신고를 접수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접수된 신고보다 3배 이상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신고는 7명을 체포하고 34명의 어린이를 구출하는 데 그쳤다. 또한 정부의 인신매매 추적 기관이 작년 120만건의 온라인 아동 성학대 사건을 발견했으나 실제 수사까지 이어진 사례는 9건에 불과했다.

아큐핀핀의 의붓아버지 역시 체포돼 아동학대금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으나 몇 년을 질질 끌다 결국 판결이 나지 않았다. 수많은 인터뷰, 증언, 청문회 그리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 법적 절차는 아큐핀핀의 상처를 계속 다시 열도록 강요했다.

만약 피해자에게 정신적 충격을 덜 주고 가해자에게 더 가혹한 처벌을 주는 법안이 아큐핀핀의 어린 시절 제정됐더라면 그는 이 사건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피해자들은 그들이 피해 당시 14~15세였기 때문에 정의를 얻지 못하고, 저 역시 사법 제도가 어느 순간 저를 실패하게 만들었다고 느낍니다. 많은 희생자들이 침묵 속에서 고통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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