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그것을 말해주는 사례는 흔하고 흔하지만 특히 로마 공화정 말기의 대혼란이 그것을 극적으로 웅변한다. 로마 공화정 말기는 카이사르(Caesar, Jullius B.C. 100-B.C. 44)와 폼페이우스, 카시우스 3인 사이에 B.C. 60년에 맺어진 3두(頭)동맹에 의해 이 3인에 의한 3인의 집정관(Consul) 체제로 권력이 분점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헤게모니 각축과 공명심 경쟁으로 3두 체제는 무너지고 로마는 혼란과 내란에 휩싸인다.

이들 3인의 대립이 날카로워지는 가운데 B.C. 50년 집정관이면서 로마 속주인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던 카시우스가 전쟁에서 죽었다. 그러자 헤게모니 각축은 자연스럽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양자 구도의 싸움으로 좁혀졌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그 세력이 강했다. 그렇지만 그의 걱정은 카이사르였다.

계속되는 승전으로 갈리아(Gallia) 지역을 평정해 국민들의 인기가 높고 날로 세력이 커져가는 카이사르가 마음에 걸리고 불안했다. 급기야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로마로 불러들여 제거하기로 모의한다. 아무리 개선장군이라도 본국의 수도에 들어올 때는 휘하 군사들을 뒤에 남기고 단신으로 들어와야 하는 관례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산전수전 다 겪은 카이사르가 자신을 죽이려는 이 같은 음모와 기도를 간파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는 전모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일단 루비콘(Rubicom)강 언덕까지 군대를 몰고 왔다. 북부 이탈리아 갈리아에서 로마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이 루비콘 강이다. 그는 강가에서 혼자 가느냐 군대를 몰고 가느냐를 놓고 잠시 생각에 잠기지만 오래 망설이지 않는다.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치고 군대를 몰아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한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쫓고 쫓기는 내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둘은 사력을 다해 B. C. 49년에서 B. C. 45년까지에 걸쳐 일진일퇴의 싸움을 벌인다. 결과는 숫자는 적지만 전투 경험이 많은 정예 병력을 이끈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월등히 숫자가 많은 오합지졸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다. 이렇게 내전을 승리로 마무리한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Dictator)이 돼 사실상 로마의 1인 지배자가 된다. 후세에 카이사리즘(Caesarism)이라 불린 카이사르 독재 정치의 시작이다.

이 카이사리즘이 카이사르의 최후의 비극을 잉태한다. 권력은 나누기도 불가능하지만 그만큼이나 1인 독식도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가. 카이사르에 권력과 그 권력으로부터 오는 온갖 특전 특혜가 집중되자 원로원은 그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부르투스 역시 그런 의심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는 마침내 카이사르를 죽인다. 그를 칼로 살해하고 ‘시저도 사랑하지만 로마를 더 사랑하기에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부르투스는 열변을 토했다.

이야기를 뒤로 돌려 카이사르가 잘나갈 때 그는 이집트를 정벌하려 했다. 그 소식을 절세 미인인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듣고 고심에 빠진다. 그때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반란 세력에 쫓겨 시리아에 망명해 와 있었다. 자신의 남동생이자 남편이며 자신과 함께 이집트의 공동 왕위에 있었던 프롤레마이오스 13세를 지지하는 세력이 클레오파트라를 축출하려 했던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18살 때 부왕이 죽자 당시 10살이었던 남동생 프롤레마이오스 13세와 근친결혼으로 부부가 되고 공동 왕위에 올랐었다. 국정은 당연히 나이 어린 동생을 제치고 클레오파트라가 좌지우지했다. 왕실의 근친혼은 왕실의 피가 다른 피와 섞이지 못하게 한다는 취지에서 법으로 규정돼 있었다. 그런데 남동생이 장성하자 그를 싸고 도는 무리들이 클레오파트라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서 클레오파트라는 ‘가재잡고 도랑치고, 꿩 먹고 알 먹고’식의 기막힌 위기 타개책을 생각해낸다. 카이사르를 유혹해 이집트의 안전도 보장받고 카이사르의 군대를 동원해 국내의 반란도 진압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시리아에서 로마로 카이사르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자신도 살고 나라도 살릴 요량이지만 성공할지 말지 모르는 모험의 길이다.

그렇지만 그는 성공한다. 미인은 영웅을 좋아하고 영웅은 미인을 좋아한다던가. 카이사르는 영특하고 미모가 빼어난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의 덫에 걸려들어 이집트의 안전을 보장한 것은 물론 그의 군대를 주어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게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도 낳았다. 이처럼 카이사르가 살아 있을 동안은 적어도 겉 보이게는 클레오파트라 자신도 좋았고 자신의 나라 이집트도 안전했다.

카이사르가 죽고 나자 로마는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명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갈등으로 내전 상태에 돌입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난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돌아와 ‘둘 중 누구를 선택해야 나도 살고 이집트도 살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 안토니우스를 선택한다.

그렇게 결단을 내린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초청해 그 역시 자신의 미모와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데 성공한다. 사실 둘의 관계는 서로 윈-윈(Win-Win)이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의 보호자가 돼주었지만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전에 들어갈 전비를 이집트에서 충당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기대와 달리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전에서 패하고 만다. 그는 이집트로 쫓겨 와 클레오파트라의 품안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에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로 끌려가 온갖 치욕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 클레오파트라도 독사에게 자신의 몸을 물려 자살한다.

참 슬픈 이야기다. 이것이 어디 미인계에 넘어간 영웅들의 얘기나 영웅을 유혹한 꼬리가 열 개 달린 여우같은 여인의 얘기에 그치랴. 클레오파트라는 나라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던진 구국의 공녀(貢女)가 아닌가. 공녀, 우리도 옛적에 살기 위해 큰 나라에 공녀를 바쳤던 서러운 비운의 역사가 있었다. 나라가 힘없는 설움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우리가 더 부강한 나라가 돼야 하는 일, 강한 안보역량을 갖추어야 하는 일에 무심한 듯한 작금의 세태가 걱정스럽다.

클레오파트라의 얘기는 그의 코가 삐뚤어졌거나 조금 더 낮았더라면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 것을 것이라느니 뭐니 하는 소리나 할 그렇게 가벼운 얘기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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