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not caption

세종이 세자시절부터 책을 좋아한 일화는 많이 알려져 있다. 잠을 자지 않고 철야로 책을 읽어 동궁을 지나던 태종이 건강을 걱정했다.

지독한 독서열로 40대에 시력이 약화돼 고생을 많이 했다. 세종의 지독한 학구열은 잠자던 조선의 문화를 일깨우는 기적을 창출한다.

세종의 총애를 받은 집현전 학사들도 늦은 밤까지 책을 읽었다. 임금이 밤을 새워 공부를 하니 젊은 신하들도 면학 풍모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울 어느 해 깊은 밤에 세종이 집현전 부근을 거닐다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내관에게 알아보니 보한재 신숙주였다. 새벽이 되어 신숙주가 잠이 들자 세종은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라고 했다. 아침에 눈을 뜬 신숙주는 자신을 덮고 있는 것이 임금의 옷임을 알고는 당황하며 감읍했다고 한다.

우리 글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를 반포하고 널리 보급하기 위한 인쇄술도 큰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세종 시기 인쇄된 전적을 보면 그 미려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2백여년 전에 간행된 전적보다 정교한 품격에 놀란다.

중국 원나라 혹은 명나라에서 수입된 활자본은 책이 작고 보잘 것 없다. 정교하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 전적에 비해 볼품이 없다. 수입된 책자를 다시 교정해 보기 좋게 만든 것이 조선 세종조 전적들이다.

그 전통을 고려 금속활자에서 찾을 수 있다.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 된 직지심체요절은 독일의 쿠덴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보다 70여년이 앞선다.

조선 초기 처음 만들어진 금속활자를 ‘계미자(癸未字)’라고 한다. 태종은 독서에만 전념하는 어린 세자에게 질 좋은 책을 읽히고자 한 것일까. 태종이 왕명으로 주자소를 설치해 1403년 계미년부터 5년 동안 구리활자 수십 만 자를 만들었다고 붙인 이름이다.

세종은 어린 시절 계미자로 찍은 책으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인쇄 상태 등이 흡족하지 않아 즉위 초기인 1420년에 ‘경자자’를 새로 제작했다. 이 금속활자도 미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양에 있는 기술자를 총 동원해 만들어 낸 활자가 금속활자의 백미로 꼽히는 ‘갑인자’였다. 1443년 훈민정음이 반포되면서 한글 활자도 처음으로 만들어져 ‘월인석보’ 등의 간행에 쓰였는데, ‘갑인자 병용 한글 활자’로 부른다.

서울 도심 종로구 인사동 지하에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금속활자를 포함, 15∼16세기에 만들어 진 금속활자 1600여점이 발견돼 서지학계를 놀라게 했다. 한글이 각자된 금속활자라는 점에서 더욱 흥분이 되는 소식이다.

왜 궁 밖 인사동 민가 지하에 묻혀 있다가 지금 세상에 햇빛을 찾게 된 것일까. 임진전쟁의 와중에서 활자장이 자신의 집에 묻어두었던 것일까. 아니면 궁에서 활자를 다시 주조하려고 동활자를 회수하는 것이 안타까워서였을까.

옛날 유적지에서 금속활자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몇 년 전 개성 만월대에서 남북 학술조사단이 찾은 금속활자는 단 두 점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국립박물관 소장의 약 30점만 현존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세종의 애민 정신이 묻어 있는 과학 유물이며 세계적 자랑거리다. 한 나라 최고 지도자의 생각과 리더십, 미래에 대한 이상이 어떠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달라짐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세종과 같은 지도자가 반드시 나와야 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