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통일국가 수립할 미소공동위원회, 좌우 대립 끝에 ‘결렬’

김일성, 무력 남침에 강한 의지 보여… 남침 치밀 계획

北 전차242대 전투기226대 vs 南 전차0대 전투기22대

‘압도적 전력’ 북한 남침, 南 낙동강까지 밀려 전선 구축

유엔군 개입으로 서울 수복, 중공군 합세해 다시 빼앗겨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체결 ‘휴전’ 한반도 폐허방불

[천지일보=김빛이나 기자] 언어도 모습도 같았던 한 민족이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며 혈투를 벌인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광복의 기쁨을 만끽한지 5년도 채 되지못해 벌어진 이 끔찍한 전쟁은 어떻게 발발됐을까. 본지는 6.25전쟁 71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유튜브 채널에 공유된 ‘6.25전쟁’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재조명해봤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한반도는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소련과 미국은 대립했고 한반도 정치인들도 이념적 대립을 일으키며 갈라졌다.

연합군이 통일국가를 수립할 방안으로 마련했던 ‘미소공동위원회’는 신탁통치 등을 둘러싼 좌우의 대립 끝에 결국 결렬됐다. 북한에서는 공산당 주도 아래 정부수립이 추진됐고, 남한에서는 유엔결의에 따른 총선을 통해 정부수립이 추진됐다.

◆北공산주의-南자유민주주의, 둘로 나뉜 한반도

결국 1948년 8월 15일 남쪽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같은 해 9월 9일 북쪽엔 공산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한반도는 두 개의 체제로 갈라졌다. 이후 무력을 써서라도 남한을 공산화하길 원한 북한 김일성 정권은 무력 침공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일제 때부터 가동되던 거대한 중공업지대를 보유하고 있던 북한은 1당 독제체제를 구축하며 단결력을 도모하는 한편 소련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남한 공산화를 치밀하게 계획했다. 반면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북진 통일 주장은 구호에 그쳤다.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김일성은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 완정’이라는 용어를 13회나 사용하면서 무력 남침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에게 무력 남침을 타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당시 북한의 전력이 압도적이지 못하다며 남침 계획을 만류했다.

다만 스탈린은 북한에 소총 1만 5000정, 각종 포 139문, T-34전차 87대, 항공기 94대 등을 지원했다. 또 전쟁 문제를 중국과도 협의하라고 했다. 이에 1949년 4월말 북한 대표가 중국을 방문했으나 마오쩌둥도 전쟁을 만류하면서 중국 내 2개 사단을 북한에 지원했다.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 남침 전쟁 도모

당시 소련은 원자탄을 보유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북한의 침략으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의 원자탄 공격을 우려했던 스탈린은 곧바로 전쟁을 허락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고, 1949년 8월 소련의 핵실험이 성공하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50년 4월초 김일성과 박헌영은 비밀리에 소련을 다시 찾았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중국이 동의하는 조건으로 북한의 남침 전쟁을 승인했다. 경제개혁 등 중국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던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동의한 북한의 남침 전쟁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고 결국 북한을 돕기로 했다.

이후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남침 공격 작전이 수립됐다. 북한의 남침 계획은 서울 점령, 대전 점령, 부산 점령의 총 3단계로 이뤄졌다. 미군의 개입을 우려했던 북한·소련·중국은 단 2개월 내 전쟁을 끝내 미군의 상륙을 막고자 했다. 이어 스탈린은 1950년 6월 16일 ‘6월 25일’을 남침 개시일자로 승인했다.

남하하는 북한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남하하는 북한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무방비 상태’ 남한, 3일 만에 서울 빼앗겨

대한민국은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지 못했다. 국군지휘부는 북한의 병력과 무기·물자의 대규모 이동 정보를 파악하고도 이를 중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국군은 6월 23일부로 경계 강화조치를 해제시켜 전방부대의 3분의 1가량이 외출이나 농번기 휴가를 나갔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기습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옹진,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 등 38도선의 모든 전선에 걸쳐 공격을 시작했다.

당시 북한군의 전력은 국군을 압도했다. 북한군은 병사 20만 1050명, 전차 242대, 포 2492문, 군함 110척, 전투기 226대를 보유한 반면 국군은 병사 10만 3817명, 전차 0대, 포 1501문, 군함 36척, 전투기 22대가 전부였다. 결국 6월 28일 새벽, 국군은 미아리 방어선까지 격파 당했다.

북한군에 의한 서울 함락 위기가 찾아오자 6월 27일 새벽 3시 이승만 정부는 급히 서울을 탈출했다. 하지만 이들은 국민에게 서울 함락 위기를 알리지 않고 떠났다. 국회의원들과 내각도 서울을 탈출했으나 서울시민들은 정부의 서울 사수 방송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은 상황이었다. 북한군은 28일 서울에 입성했고 90만명에 달하는 서울시민 대부분이 적 치하에 갇혔다.

남북 전력 비교.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남북 전력 비교.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불타는 건물.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불타는 건물.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안보리, 유엔군 파병 결의… 통합사령부 설치

북한군은 서울 입성 후 3일간 지체했고, 국군은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얻었다. 세계정세를 살폈던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이 의미하는 바를 꿰뚫고 있었다. 그는 북한의 공격이 단순히 한반도에 국한된 게 아니라 세계 자유진영에 대한 공산진영의 공격이라고 봤다.

1950년 6월 24일(미국시간) 휴가지에서 북한의 남침 소식을 접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격노하면서 “모든 수를 써서 북한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남한이 공산화되면 일본이 위협받고 세계 반공전선에서 미국의 신뢰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소집을 제시했다. 유엔은 신속히 움직였다. 6월 25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퇴각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무시했고, 이틀 뒤인 27일 유엔 안보리는 유엔군 파병을 결의했다.

1950년 7월 유엔군을 지휘할 통합사령부가 설치되고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당시 유엔군 지원을 살펴보면 ‘병력’은 16개국(193만 8330명), ‘의료’는 5개국(야전병원·이동외과·병원선), ‘물자·재정’은 38개국(783만 4013달러)에 달했다.

유엔 파평 전력.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유엔 파평 전력.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국군과 유엔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국군과 유엔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 전세 역전

8월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로 남겨둔 상황에서 대구를 중심으로 서남부는 유엔군이, 동북부는 국군이 방어를 맡았다. 북한군과의 혈전은 9월초까지 계속됐다. 특히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선 55일간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지를 탈환했다가 다시 뺏기기를 반복하며 이 전투에서만 북한군 2만 4000여명, 국군·유엔군 1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했다. 한반도 중부에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면 낙동강 전선의 유엔군·국군이 대반격에 나선다는 계획이었다.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는 역전됐다.

유엔군·국군은 9월 28일 서울 수복을 이뤘다. 이어 10월 1일 강릉 방면의 국군 3사단이 최초로 38선을 돌파했다. 국군 1사단은 10월 19일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 압록강까지 올라간 유엔군·국군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생각했다.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는 맥아더 장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는 맥아더 장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서울 수복.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서울 수복.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중공군의 반격… 유엔군·국군 흥남철수작전

그러나 김일성은 10월 1일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다급히 지원을 요청했고, 중국은 60만명 이상의 병력을 북한에 지원했다. 소련도 11월부터 전투기 등 공군을 동원해 참전했다. 중공군의 개입을 과소평가했던 유엔군은 참패를 거듭하며 남쪽으로 후퇴했다.

유엔군·국군은 1950년 12월 15~23일 흥남철수작전을 진행했고 이때 주민 10만여명도 함께 빠져나오게 됐다. 중공군의 남하는 계속됐고 결국 1951년 1.4후퇴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다시 내어주게 됐다. 하지만 유엔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반격에 성공한 유엔군·국군은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했고, 3월말엔 38도선까지 진격했다.

1951년 4~5월 전선은 교착됐고 양 진영은 무력으론 사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휴전을 모색하게 됐다. 정전협정에서 남북 간 경계선은 전시 군사 접촉선으로 합의됐으나 포로 귀환 문제를 놓고 갈등 끝에 회담은 지연됐다. 이후 1953년 3월 휴전회담이 다시 열렸다.

교전 중인 국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교전 중인 국군.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휴전 회담.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휴전 회담.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이승만 ‘휴전반대’에 美 한미상호방위조약 약속

이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 반대가 시작됐다. 그는 휴전 후 미군이 철수하면 중공군의 지원을 받는 북한의 위험 아래 다시 놓이게 될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 먼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 정전협정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1953년 6월 미국이 원치 않았던 ‘반공포로 석방’을 강행하는 등 이 대통령의 끈질긴 투쟁으로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됐고, 결국 그 해 7월 미국은 특사를 파견해 이 대통령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겠다는 뜻을 전하게 됐다.

◆수백만 목숨 앗아간 6.25전쟁 결과 ‘참혹’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드디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3년 1개월 2일, 1129일간 지속됐던 6.25전쟁은 휴전상태에 들어가게 됐다. 전쟁은 멈췄지만 한반도는 폐허를 방불케 했다. 주택·학교·병원·도로·철도 등 기반시설과 공장 등 각종 산업시설 대부분이 파괴됐다.

남한의 경우 군인 사상·실종자가 62만명, 민간인 사망·부상·실종 99만명, 유엔군 사상자 15만명이었다. 수십만의 전쟁고아와 미망인이 발생했고, 이산가족은 1000만명에 달했다. 북한 측도 군 사망·실종 64만명, 중공군 사망·부상 97만명, 민간인 피해 150만명이 나왔다. 수많은 이들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6.25전쟁의 끝은 이같이 참혹했다.

폐허가 된 마을.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폐허가 된 마을.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유튜브 화면캡처) ⓒ천지일보 202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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