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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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특별법안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했다. 2001년에 특별법이 발의된 뒤 20년이라는 통한의 세월이 흘렀다. 19대와 20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무산됐다. 21대 국회가 시작되자마자 또 발의됐지만 진척이 없다가 11개월 만에 상임위를 통과했다.

상임위 통과는 환영할 일이지만 마음 편히 환영할 수가 없다. 국가폭력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사건 다음 해 전라남도 조사로는 1만 1131명)이 희생된 천인공노할 사건임에도 73년이라는 긴긴 시간 동안 진상을 묻을 것을 강요받은 세월의 무게 때문이다. 당시 역사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고인이 됐고 유족 상당수가 80~90대 고령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이름으로 어떤 잘못도 없는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살육하는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국가는 사과, 진상규명과 배·보상이라는 옳은 길을 버리고 역주행하는 행태를 보였다. 통탄할 일이다.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진상에 대해 입도 벙긋 못하게 했다. 좌익이라는 딱지를 붙여 땅 위에서 온전히 살 수 없도록 하고 연좌제를 적용해 자손과 친인척의 사회진출과 평온한 삶을 방해했다. 사건이 있은 지 73년이 지나서야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는 것은 원혼이 된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백배 머리 조아려 사죄해도 모자랄 일이다.

지난해 1월 철도원 장환봉씨를 비롯한 희생자 3명에 대한 재심을 맡은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사과도 했다. 국가기관이 모처럼 옳은 일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가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의 사과가 없고 국민을 대리하는 기관이라 할 수 있는 국회의장이 사과를 하지 않았다. 사법부의 대표라 할 대법원장의 사과도 없다. 매우 잘못된 일이다.

이제 공은 법사위로 넘어갔다. 법사위는 역사에 의미 있는 법률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발목 잡는 역할을 해온 지난 시절의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법사위는 여순사건 특별법안을 신속하게 통과시키고 법사위 통과 절차를 밟자마자 본회의에 상정해 특별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어물쩍거리다가는 실기할지도 모른다. 또다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통과를 무산시킨다면 21대 국회는 역사에 씻지 못할 죄를 짓게 될 것이다.

본회의 통과가 이루지는 즉시 박병석 의장은 첫 법안이 발의되고도 20년의 세월을 허비한 잘못에 대해 반성하는 말과 함께 70년 넘는 세월 동안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은 잘못에 대해 희생자들과 유족에게 정중히 사과하기 바란다. 국회의장의 사과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입법기관으로서 책무이다.

경찰, 검찰, 군대, 사법당국과 대통령 또한 사과해야 한다. 반인륜적이고 반인권적인 국가폭력 행위에 대해 국가의 이름으로 사과해야 한다. 해당 국가기관과 대통령이 잘못을 인정함과 동시에 사과가 동반될 때 역사가 바로 잡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역사정의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과거 국가기관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고 성찰할 때, 그리고 사실을 왜곡해 기록한 역사를 바로 잡을 때 역사정의가 바로 서기 시작할 것이다.

특별법안의 통과가 지체된 데에는 여당의 의지 문제가 크지만 제1야당인 국민의힘 측의 몽니와 비협조가 큰 걸림돌이었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법안 통과에 협조의사를 밝히고 행안위 통과에 힘을 보탠 것은 매우 잘 한 일이다. 예전에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하지만 짚을 게 있다. 법안 처리 전날 김기현 원내대표는 “당내 여러 사정이 있지만, 호남에 대한 대승적 배려 차원에서 ‘여순사건특별법’ 처리를 동의해 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은 특정 지역에 대한 배려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정략적으로 생각할 문제는 더 더욱 아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국가폭력이 잘못됐다는 걸 확인하고 오도된 역사를 바로 잡는 과정이자 인권의 문제다. 국민의힘이 진정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면 한국전쟁 전후 세계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자행된 국가폭력에 대한 인식부터 바로 잡을 것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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