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의 단원풍속화첩인 '담배썰기'. 맨 아래쪽의 부채를 든 사람은 이야기꾼인 전기수로 보인다. (제공: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1.6.15
단원 김홍도의 단원풍속화첩인 '담배썰기'. 맨 아래쪽의 부채를 든 사람은 이야기꾼인 전기수로 보인다. (제공: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1.6.15

청중 감수성 ‘전기수’가 채워
인간 메신저 ‘보장사’도 등장

양반들 매 대신 맞기도 하고
품삯받고 대성통곡도 해줘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세상이 변화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일의 방식도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사무실에 종일 앉아서 근무하기보다는 조직에서 독립해서 홀로 일하는 ‘독립근로자(인디펜던트 워커(independent worker)’가 앞으로 더 인기를 끌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로 잡코리아·알바몬 등에 따르면, 성인남녀 10명 중 7명은 독립적인 일을 선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독립적인 근무 형태는 오늘날뿐 아니라 선조들도 많이 했던 방식이다. 이와 관련해서 특별했던 조선시대 일자리를 알아봤다.

◆말솜씨에 양반도 꼼짝 못 해

조선시대하면 보통 시전(市廛)을 많이 떠올릴 것이다. 오늘날 종로를 중심으로 해서 당시 상설시장이 펼쳐지고 다양한 물품이 판매됐다. 나루터에서도 상인들의 바쁜 움직임으로 조선의 경제는 발전해갔다. 그런 가운데 조선시대에 특별한 직업이 있었다.

바로 조선시대 1인 크리에이터인 ‘전기수(傳奇叟)’다. 먹고 살기 바빴던 조선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감수성을 채워야 했다. 특히 18세기 조선은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 틈을 비집고 나타난 전기수의 활약은 대단했다. 전기수는 당시 책 읽을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읽어주는 오디오북 서비스를 제공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고 다양한 소설의 내용을 말로 전했는데, 연기력까지 일품이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재밌어질 때, 갑자기 말을 멈춘다. 뒷이야기는 돈을 지불해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전의 내용은 일종의 ‘미리보기’인 셈이었다. 인기가 많은 전기수는 양반가의 집에 초청되기도 했다. 전기수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업복’이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본래 직업은 청지기였는데, 한양에서 그의 명성이 자자했다.

곤장 맞는 모습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 2021.6.15
곤장 맞는 모습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 2021.6.15

◆타는 말보다 사람이 더 잘 전해

흔히 한국을 문화강국이라고 부른다. SNS 등 메신저로 단 몇 초 만에 다른 지역의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는 시대다. 그럼 과학이 덜 발달한 조선은 어땠을까. 짐작하는 것처럼 당시에는 지인에게 소식을 전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간혹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빠른 말을 타고 소식을 전하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험한 산과 강이라도 나오면 이마저도 어려웠다. 또 말 가격이 비싸고 귀해서 쉽게 구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인간 메신저인 ‘보장사’는 필요한 존재였다. 이들은 하루에 수 백리를 달리며 국가나 개인의 소식을 타인에게 전했다.

조선시대에는 ‘매품팔이’도 있었다. 이들은 양반을 대신해서 매를 맞는 직업이었다. 매품팔이가 곤장 100대를 맞고 버는 돈은 7냥이었다. 여러 사료에 보면, 당시 1냥은 약 100푼인데 당시 일용노동자의 일당은 20푼이었다. 그러니까 매품팔이는 하루 임금의 수십 배를 벌 수 있었다.

‘곡비(哭婢)’라는 직업도 있었다. 품삯을 받고 장례식에서 곡성이 끊이지 않도록 우는 직업이었다. 예로부터 울음은 죽은 이들의 슬픔을 애도하는 죽음 의례로 여겨졌다. 그래서 고인(故人)과 가까운 관계일수록 울음소리가 더욱 커야 했고, 혹여 자식의 울음소리가 그치면 불효로 여겼다. 당시 번갈아 가며 곡을 하는 대곡(代哭)이 있었는데 이를 해결하고자 ‘곡비’라는 신종 직업이 생겨났다. 세종실록(1419년 12월 21일자)에 보면 “예조에서 고하기를 ‘전조의 국장 및 선왕의 장례식에 저자의 여자들을 불러다 울면서 상여를 따라가게 하고, 이를 통곡비(痛哭婢)라 하는 것이 진실로 좋지 못한 일입니다”라고 적혀있다. 왕실에서도 곡비를 사용했다는 증거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1인 크리에이터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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