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태고종 총본산 봉원사 주지 일운스님 인터뷰

▲ 일운스님이 "영산재는 우리 국민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동시에 세계인들과 공유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이길상 기자]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는 한국불교의 전통 종단인 태고종 총본산 ‘봉원사’가 자리 잡고 있다. 봉원사는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 가고 있으며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를 전승보존하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영산재란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여러 중생이 모인 가운데 법화경을 설하는 모습을 재현화한 불교 의식이다.

영산재는 2009년 9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는 영산재의 예술성과 종교적 숭고함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린 노력의 결과다. 그 중심에 봉원사 주지이자 영산재보존회 회장인 일운스님이 있었다. 일운스님을 만나 그의 수행이야기와 영산재 세계화를 위한 비전을 들어봤다

◆인연에 의한 출가
일운스님의 큰댁은 봉원사 인근의 금화터널 근처에 있다. 그는 어려서 큰댁에 자주 놀러갔고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그의 손을 잡고 봉원사에 자주 들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 보유자였던 만봉스님(1909~2006)과 할아버지는 절친한 사이였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사이였지만 두 분은 친구처럼 막역했다.

어린 일운스님의 눈에 비친 만봉스님과 봉원사 스님들의 모습은 해맑았다. 스님들의 모습이 그는 마냥 좋았다. 스님은 그때부터 이미 출가와 연이 닿고 있었던 것 같다.

스님에게 출가한 동기를 묻자 “인생살이 무상하고 무엇을 크게 느껴 출가한 것이 아니다”며 “거창한 출가 동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굳이 출가 이유에 대해 더 캐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인연에 의해 출가했을 테니 말이다.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세 분 스승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만봉스님은 그가 닮고 싶은 인생의 모델이다. 만봉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은 그에게 교과서였던 셈이다. 은사인 혜경스님은 작년에 열반했는데 호랑이 같은 분이었다. 은사 스님은 그의 행자시절부터 사미생활까지 눈물이 쏙 빠지도록 무섭게 공부를 시켰다. 요즘말로 ‘번지수를 잘못 찾아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일운스님은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날 문득 크게 깨달은 게 있었다. 은사 스님께서 큰 법문을 내려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부처님 법이 경전속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실생활 속에 그대로 들어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후로 그는 은사 스님을 부처님, 친아버지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은파스님은 그에게 염불을 가르쳐준 큰 스승이었다.

그는 해군 수병 141기로 군 복무 성적이 좋았다. 당시 군 복무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은 전역 후, 해군 예비역들이 운영하는 선박회사인 ‘코리아라인’에 취업할 수 있었다. 제대를 앞두고 스님은 은사 스님을 찾아갔다. 코리아라인 취업 문제를 상의하러 간 것이다. 일운스님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은사스님에게 물어봤더니 “지금 가면 군대에서 배운 것으로 먹고 살수는 있겠지만 출가해서 지금까지 배운 염불이 아깝지 않느냐, 일반 사찰에서 하는 염불 같으면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우리 사찰에서 하는 염불은 누구나 다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은사 스님은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염불이 탁월한데 속가에 가서 살면 다 잊어버릴까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서 가는 길을 막지는 않았지만 자꾸 아깝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일운스님은 며칠을 두고 고민을 했다. 결국 그는 부처님 같은 은사 스님의 뜻을 저버리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 2010 영산재 공연 모습. (사진제공: 일운넷)

◆공심
일운스님은 1984년도에 봉원사 ‘교무’ 소임을 맡았다. 그전까지는 ‘하소임’이라고 해서 사찰의 모든 심부름을 도맡아 했었다.

일운스님은 ‘교무’ 소임을 처음 맡았을 때 은사 스님이 하신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있다. 은사 스님이 “자네가 소임 자리에 처음 들어갔기 때문에 얘기한다”며 “교무라는 소임은 이 큰절에서 스님들과 신도들을 교육시켜야 하는데 자리만 지키고 월급만 축내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운스님이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습니까?”라고 은사 스님에게 물어봤더니 그는 “우선은 공심을 가져라. 공심이란 예를 들자면 업무상 사람을 만날 때 쓴 비용을 사찰의 경비로 쓰지 말고 개인 돈으로 쓰고 대중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임을 빙자해 사찰의 공금을 쓰는 습관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은사 스님의 가르침이었다.

일운스님은 봉원사의 재무ㆍ총무 소임과 옥천범음대학 학장을 하면서 은사 스님이 하신 말씀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으며, 지금도 하루 세 번씩 은사 스님의 말씀을 생각한다고 한다. 내가 과연 오늘 하루도 내 자신과 직무를 위해 충실했는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부처’
스님은 자신에게는 물론, 종교인들에게도 경계의 말을 했다. 스님은 “종교인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마음은 더 황폐화되고 자연환경은 점점 더 파괴되고 있다”며 “종교인들이 제 역할을 다 했다면 사회의 병든 것이 치유됐을 것이고, 어려운 사람들도 보듬어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이 됐을 터인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종교인들의 책임”이라면서 말보다는 행함이 앞서는 종교인들이 돼야 함을 강조했다.
<금강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나무로 만든 부처님은 불 위를 지나갈 수 없고, 쇠로 만든 부처님은 용광로 위를 지나갈 수 없다. 또한 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물 위를 지나갈 수 없다.” 재료로 만든 형상이 부처가 아니라 우리 마음 자체가 부처라는 가르침이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믿음생활이 아니라 신행생활이라고 일운스님은 말한다. 스님은 “부처님은 우리에게 빛으로 오셨다”며 “부처님 자신이 무엇을 만들거나 발명했다는 얘기는 없다. 본래 있던 것인데 그것을 중생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가르쳐 줄 뿐”이라면서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나와 가정의 행복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방편삼아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신행생활이라고 스님은 정의했다.

지금 종교계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소통’이 화두다. 소통이 되지 않는 조직은 죽은 조직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무시하면 대화가 안 된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 소통이 가능하다”면서 겸손한 자세로 상대를 존중하는 열린 마음을 가질 때 우리 사회는 막힘없이 소통이 원활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2011년 중국 강소성 무석상부선사 영산재 공연 모습. (사진제공: 일운넷)

◆영산재에 거는 꿈
일운스님은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독일 부탄 등 외국에까지 영산재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해외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는 유네스코 문화재 위원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학술대회에 참가하면서 영산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그 가치가 충분함을 알게 됐다. 일운스님은 이런 부분이 영산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영산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을 통해 스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공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일운스님은 세계에서도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는 영산재를 어떻게 하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감동에 젖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나라에 영산재 공연을 갈 때면 극장의 음향시설, 무대시설, 관중석의 의자 배열 등을 꼼꼼히 살핀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의 기획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펴본다.

일운스님은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다. 바로 봉원사에 ‘영산재 상설 공연장’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예술혼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은 물론 템플스테이ㆍ영산재전승관 등과 어우러진 관광벨트를 조성함으로써 우리나라 관광산업에도 큰 기여를 하겠다는 소망이다. 이 사업은 그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며, 나아가 태고종 또는 불교의 일도 아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영산재는 우리 국민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동시에 세계인들과 함께 공유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그렇기에 국민 모두는 이 일에 정성을 모으고 특히 정부 관계 부처가 먼저 나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그는 소망하고 있다.

세계무형문화유산인 영산재는 보유자가 현재 한명만 지정돼 있다. 본래 보유자는 다섯이었는데 생존한 사람은 현재 한 명으로 혼자 감당하기 매우 벅찬 상태다. 영산재를 올곧이 전수하기 위해서는 보유자를 더 지정해줘야 한다고 그는 호소했다. 지금하루에 끝내고 있는 영산재를 예전처럼 3일간으로 환원시키고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보유자 추가지정이 꼭 필요하다는 얘기다,

영산재를 통해 사회정화와 세계평화에도 이바지하겠다는 일운스님의 바람이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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