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살다 보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지고 몸의 피로가 견디기 어려운 지경으로 쌓일 때가 있다. 이럴 때는 휴식 말고는 약이 없다. 휴식을 통한 몸과 마음의 이완(弛緩, Relaxation)이 꼭 필요하다. 개인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견디어내는 피로도의 한계가 있다. 이 한계치를 넘으면 몸과 마음은 무너진다. 몸에 병이 나든지 정신의 건강을 잃는다.
적을 향해 무섭게 총을 쏘아야 할 해병대 초병이 엉뚱하게 정상 항로를 가는 민항기를 향해 총격을 가했다. 강화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민항기는 한‧중 항로를 따라 한국으로 날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무사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1983년 옛 소련 공군기의 미사일 공격에 북태평양 소련 연안 오오츠크 바다에 떨어진 KAL기의 참극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 해병대 초병의 오인 총격은 극도에 달한 몸과 마음의 피로도 때문이었다고 원인의 하나로 파악됐다. 사람은 전지전능하지 않기에 이렇게 피로도가 한계에 달할 때 사고를 치기 쉽다.
그런가 하면 역시 강화도의 어느 해병대 내무반에서는 총기 난사로 한 방을 쓰는 동료 전우들을 살상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단체 생활은 즐거울 수도 있지만 서로에 대한 존경과 배려가 없으면 지옥이다. 자율보다는 타율이 지배하는 특수 사회인 군대에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전우를 쏜 그 방향 착오의 총격도 일단은 그 같은 선후배 동료 사이에 꼭 필요한 것이 결여됨으로서 일어난 인간관계의 잘못에 인과율(因果律)이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적과 대치하는 긴장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대원 중 어느 누구랄 것 없이 심신이 지치고 예민해질 수 있다. 피로도가 극에 달한 바로 이러한 때 사소한 시빗거리도 심화(心火)를 끓어오르게 하고 자칫 욱하고 그것을 터뜨리기 쉽다. 피로에서 심신을 건강하게 복원시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 각자가 알아서 할 몫이다. 하지만 자율이 제한된 특수 사회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조직 관리는 인간 관리다. 조직을 합목적적으로 원활히 이끌어 전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조직의 성원들을 부리는 지휘관들이 부하들의 애로와 피로도를 잘 살피고 관리해야 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처럼 명령하면 그대로 움직이고 효율을 내는 것이 아니다. 조직은 성원의 심신이 건강해야 전체 조직이 건강하다. 성원 각자가 자율적으로 성심성의를 다할 수 있게 해주어야 조직의 효율과 성과가 극대화된다. 뭐라고 말해도 전우에게 총격을 가한 그 엄청난 사건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제발 그 같은 깊은 이치를 제대로 깨달아 사건의 재발을 막아달라는 취지에서 하는 말이다.
국민의 피로도가 극으로 치닫는 것 같다. 나라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 만큼 개인에게 보답으로 돌아오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세계 10대 강국이지만 개인마다의 생활수준에 있어서 세계의 모든 개인과 비교해 꼭 그처럼 상위에 랭크(Rank)된 것은 아니다. 몇 몇 재벌과 같은 소수는 나라가 부강해지면서 직접적으로 혜택을 받아 부를 싹쓸이하지만 다수는 부가 느는 것이 아니라 빚이 눈덩이처럼 는다.
이것이 이른바 심각한 부의 편중문제이며 그 그늘에서 생겨나는 가계부채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안간힘을 다해 성장신화에 편승해 부를 추구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손에 들어오는 것은 없고 피로감만 더할 뿐이다. 사람들은 지쳐있다. 그 피로도, 바로 국민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한 느낌이다. 이를 방치해도 되는 것인가. 아니라면 누가 풀어주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빚을 지는 것은 개인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지금은 사회의 저소득 구조와 고비용 구조 탓이 크다. 가계부채문제의 발단이 그렇다면 그 해결도 전적으로 개인 가계에 내맡겨 될 일은 아니다. 의식주는 물론 생활 전반에 걸친 고비용 구조를 국가가 뜯어 고치지 않고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은 국민 각자가 삶의 질을 놓고 경쟁하는 시대다.
그것이 보편적인 사회 트렌드(Trend)다. 예컨대 좋은 집, 웰빙 식품, 예쁘고 좋은 옷, 레저와 문화생활, 첨단 문명에 토대를 둔 삶을 추구한다. 육아와 교육도 마찬가지다. 꼭 사람들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경제시스템과 사회가 제도적으로 이를 권장한다. 바로 고비용 구조다. 나라가 부강해지면서 그 같은 풍조는 심화된다. 그런데 그것을 뒷받침할 소득 창출 수단은 고갈돼간다.
이렇게 나라 곡간은 차 있고 국민의 많은 수가 곤궁하고 피로를 극심하게 느낄 때 포퓰리즘은 고개를 든다. 공짜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나.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주겠다는 공짜 받아 먹고나 보자는 생각을 하기 쉬울 것이다. 그렇지만 포퓰리즘이 제공하는 공짜는 진짜 공짜가 아니다. 당장은 곶감처럼 달지만 그것은 곧 국민들에게 세금 청구서로 날아올 외상이며 무서운 빚이다.
이렇게 공짜 좋아하다가는 나라 살림도 개인 사림도 지탱해내지 못한다. 그러니까 황당한 포퓰리즘은 결국은 나라와 국민에게 독약이다. 그럼에도 내년 총선과 대선에는 그 포퓰리즘의 선풍이 휩쓸 것이 틀림없다. 당장은 그것이 피로도가 극에 달한 국민들에게 최고의 피로 회복제처럼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욕과 권력의지에 불타는 정치인들이 포률리즘이 먹혀들어갈 찬스를 놓칠 리 없다. 나중이야 어찌되든 ‘공짜’ ‘무상’의 선물을 쏟아낼 것이다.
국민이 이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려면 극에 달한 지금의 국민적인 피로도를 풀어주어야 할 텐데 현 정권이 국정의 경영능력을 끝까지 유지해갈지가 걱정이다. 국민의 피로회복제는 바로 저소득 구조와 고비용 구조를 고소득 구조와 저비용 구조로 바꾸어 놓는 일이다. 적어도 국민이 개인의 미래에 대해 나라가 부강해지는 만큼의 후생의 보답을 확신하게는 해주어야 하지 않나.
그 같은 희망을 품게 해 국민의 피로도를 덜어 주는 것이 무차별로 불 포퓰리즘 선풍에 대한 선제적 방어책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라의 운명이 달린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국민이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