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어느 순간 문득 철리(哲理)를 깨닫는 것이 ‘돈오(頓悟)’다. ‘돈오’라는 말의 출처는 불교다. 고대 중국의 동진 시대 사람인 도생(道生)이라는 승려가 돈오성불설(頓悟成佛說)을 주창하면서 맨 처음 사용한 용어다. 잘 모르긴 하지만 ‘돈오’라는 말을 맨 처음 쓴 것은 도생이지만 도생이 그 말을 쓰기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불현듯 진리를 깨닫는 ‘돈오’를 체험했을 것이 분명하다.
‘돈오’는 철리를 점차적으로 깨닫거나 논리나 과학, 언어적 방법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섬광 같은 직관이나 비언어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을 일컫는다. 장자(莊子)는 ‘뜻을 깨우치면 말이 쓸모없다(得意妄言)’고 했다. 이것이 ‘돈오’의 경지다. 이 말과 같이 ‘돈오’는 말이나 논리, 과학적 방법에 의한 깨우침을 말하는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돈오’로 깨달은 철리를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불교 용어로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이므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 말을 뒤집으면 ‘사람의 마음속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보통 사람들이 모를 뿐이지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돈오’로 깨달아지는 철리가 담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돈오’는 내 마음속에 있는 철리와 진리의 갑작스런 발견인 셈이다.

예수나 석가모니는 이승에 그들을 가르친 스승이 없다. 그들은 애초부터 인생의 스승으로, 인생의 길이요 빛이요 진리로 태어났다. 예수는 사람 몸으로 태어난 하느님이며 석가모니는 엄마 탯줄에서 벗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즉 자신이 지존(至尊)임을 선언했다. 엄마 아빠가 그들의 손을 이끌어 학교에 데려간 일도 없고 학교에서 무슨 탁월한 논문을 써 학위나 자격증 따위를 딴 일도 없다. 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벌써 ‘돈오’가 있었던 셈이다. 아니 애초부터 아예 ‘돈오’같은 것이 필요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예컨대 하느님은 알파요 오메가이며, 시작이고 끝이며, 길이요 빛이요 진리인데 그 같은 전지전능한 존재에 ‘돈오’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는 사탄의 시험을 받으며 광야를 헤맨 고행(苦行)의 40일이 ‘돈오’의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었는지 모른다. 부처는 왕실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출가해 보리수(菩提樹) 밑에서 명상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돈오’다. 후생(後生)의 인간들은 이들이 얻은 ‘돈오’의 진리를 깨달으려 그들과 마찬가지로 섬광 같은 ‘돈오’의 경험을 고대하며 힘든 수행을 쌓아가고 학문의 길을 가는 것 아닌가.
어떻든 이 ‘돈오’는 서양보다는 동양의 종교나 학문, 철학, 예술에서 더 친숙하게 받아들여지는 용어다.

‘돈오’가 있어야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 만들어내는 종교나 학문, 철학, 예술이 어떤 경지에 오른다. 이것들 모두는 어느 것이든 말하자면 정리되어 표현되기 전에는 태초의 우주처럼 혼돈(混沌, Chaos)의 상태로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것이 ‘돈오’든 영감(靈感)이든 무엇이 있어 깨달음이 있어야 가닥이 잡혀 정리되고 표현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일체유심조’ 바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며 모든 것은 결국 마음속에 있다. 공상과학에나 등장하던 우주선이나 무기들, 각종 첨단 문명의 이기들이 만들어지는 것도 사람 마음속에 이미 있는 그것들을 찾아내어 조형화하고 구조화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쁨과 슬픔, 눈물과 웃음도 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돈오’의 경험에 있어서 서양이라고 동양과 다를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들에게도 ‘돈오’를 말하는 ‘Sudden enlightenment(문득 깨달음)’나 ‘Spiritual awakening(정신적인 각성)’과 같은 용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일 것이므로 동서양이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돈오’에는 두 가닥이 있다. ‘돈오’로 철리를 깨달은 뒤에는 그것으로 철리를 완전히 깨우친 것이므로 더 수행할 것이 없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 후에도 점차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가 그것이다.

끝없이 이어질 논쟁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것까지를 옳다 그르다 왈가불가할 것은 없을 것이다. 이 논쟁은 견해가 다른 사람들끼리 다투거나 말거나 내버려 놓아두어서 나쁠 것이 없다.

어떻든 지금 우리에겐 민족적인 대 ‘돈오’가 필요한 시점이다. 통일의 대업과 부강한 나라가 되는 길을 민족적인 대 ‘돈오’와 대 ‘각성’을 통해 깨달아 찾아내어 그 길을 흐트러짐 없이 가는 일이 그것일 것이다. 통일의 대업과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부질없는 좌우 이념의 어두운 동굴에 갇혀 대국적인 것을 못 보는 우(愚)에서 깨어나야 하며 지역 및 계층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국민들은 내 손으로 뽑는 지도자들과 그들이 통솔하는 모든 권력기구와 기관의 공복들이 먼저 민족적인 대 ‘돈오’의 전위가 되고 롤 모델(Role model)이 돼줄 것을 간절히 기원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지도자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도덕성과 청렴성, 사회적 룰(Rule) 집행자로서 공정성을 발휘해 국민들이 그들을 믿고 따르도록 해야 한다. 지금처럼 모두가 부패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어서는 국민은 희망을 잃고 흩어진다. 부패와의 인연을 단호히 끊는 그야말로 대 ‘돈오’가 지도자들에게 요청되고 있다 할 것이다.

과거의 역사는 대붕처럼 구만 리 장천을 날아 유유히 꼬리를 빼는데 참새 떼들의 지저귐 같은 역사 시비는 아직도 국민들의 귀를 부질없이 따갑게 한다. 북한의 남침이 발단이 된 것이 국내외 자료를 통해 명백한 6.25전쟁을 무슨 근거와 의도에서인지 북침이라고 악을 쓰는 일도 그러하다. 현재의 우리를 민주국가이며 경제 강국이 되도록 토대를 놓아준 압축성장의 산업화 과정을 부정만 하려는 시도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것들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과거에 퇴행적으로 잡아 묶는 우둔한 일이 아닌가. 정말 대 ‘돈오’, 대 각성이 있어야 한다.

성장에 걸맞은 분배와 국민복지는 필수적이고 절실하지만 분별없는 포퓰리즘(Populism)의 정치 선풍이 그동안 애써 쌓아 놓은 우리의 자산을 풍비박산 내버리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커진다. 이것 역시 민족적인 대 ‘돈오’를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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