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의친왕(義親王)이 대한민족 대표단 연명부 청원에 황족대표(皇族代表)로 서명한 사건에 이어서 경주 최 부자(慶州崔富者) 가문(家門)의 마지막 부자로 알려졌던 최준(崔浚)과 의친왕의 관련성에 대하여 소개한다.

흔히 알려진 경주 최 부자 가문의 역사는 최준의 11대조인 최진립(崔震立)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활동을 하면서 왜적을 무찔렀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국(殉國)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최진립을 시작으로 하여 이어진 300년 동안 10대에 걸쳐서 이 가문에서 만석지기의 전통을 유지하였는데 최준은 그러한 만석지기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1884(고종 21)년에 경주에서 출생하여 1970년 향년(享年) 87세에 별세(別世)하였으니 참으로 장수(長壽)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행적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점은 대부분의 재산을 당시 군자금(軍資金)을 지원하는데 투자하였다는 점인데, 구체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으로 상해임정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던 백산상회(白山商會)에 끊임없이 군자금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백산상회(白山商會)는 처음에 안희제(安熙濟)가 사재(私財)를 털어서 설립하였으며, 나중에는 주식회사(株式會社)로 확대, 개편되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최준은 사장(社長)으로 활동하였다.

이제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의친왕과 최준의 인연(因緣)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의친왕이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 당시 최준의 집에 1주일 체류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다.

최준은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1884(고종 21)년생으로 1877(고종 14)년생인 의친왕보다 7세 연하인데, 의친왕은 그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지어 주었으며, 그 이후 최준은 문파(汶坡)로 알려졌던 것이다.

한편 의친왕과 최준이 이러한 인연을 맺은 이후 최준 가문에 결정적인 위기가 닥쳐왔는데 백산상회의 사장으로서 전재산의 대부분을 군자금 지원하는데 사용하였던 최준이 100만원이 넘는 엄청난 빛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의친왕이 당시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총재(總裁)였던 아리가를 직접 만나서 빚의 탕감을 요청하였는데 이러한 의친왕의 부탁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실제 최준의 빚이 50% 탕감되었다.

이와 관련해 의친왕이 상해임정에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한 최준의 빚을 탕감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의친왕은 1930년 6월 12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은퇴(隱退)당하였는데, 구체적으로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일제로부터 받은 공족(公族)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그의 모든 재산을 장남인 이건(李鍵) 황손(皇孫)에게 상속한다는 것인데 과연 의친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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