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동 별서원림은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있는 민간 정원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자연관과 철학적 사유가 깃든 은밀(隱逸)의 공간이다. 사진은 백운동 원림의 봄 풍경. (제공: 강진군) ⓒ천지일보 2021.5.14
백운동 별서원림은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있는 민간 정원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자연관과 철학적 사유가 깃든 은밀(隱逸)의 공간이다. 사진은 백운동 원림의 봄 풍경. (제공: 강진군) ⓒ천지일보 2021.5.14

강진 백운동 원림
 

처사의 삶 이담로와 손자
18세기~9세기 중엽 완성
별서이면서 주거 성격 공간
월출산 배경 뛰어난 경관미

[천지일보 강진=김미정 기자] 남도 지방 고유한 특성을 갖춘 별서정원인 백운동 원림. 

처사의 삶을 산 입산조 이담로와 그의 손자 이언길이 백운동 별서를 처음 경영하고 일군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모습을 갖춘 것은 18세기 중엽 이덕휘에서 19세기 중엽 이시헌에 이르기까지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군에 따르면 원래 백운암(白雲庵)이라는 암자 터로 추정되는 곳에 은거를 위한 별서(別墅)로 조성했으며 나중에는 이언길의 아들 이의권 가족이 옮겨옴으로써 별서이면서 영농과 주거의 성격을 함께한 복합적 공간이 됐다.

백운동 원림은 월출산을 배경으로 계곡 주변의 경승요소를 정원 안과 밖으로 끌어들이는 뛰어난 경관미와 차경 안목이 돋보이는 입지적 특성을 지닌다. 또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복잡한 정신세계의 심리를 정원의 구성 요소로 표현하고, 정원 조영을 통해 이를 승화시키고자 한 작정자의 조영관이 투영된 원림이다. 좁은 진입부의 계곡, 멀리 올려다보이는 월출산 정상부의 원경, 그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한 대지와 그 주변의 경승으로 이뤄진 경관미 등 다양한 입지적 특성을 갖는다.

백운동 원림. (제공: 강진군) ⓒ천지일보 2021.5.14
백운동 원림. (제공: 강진군) ⓒ천지일보 2021.5.14

◆백운동 별서원림(別墅園林) 조성배경

백운동 별서원림은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 있는 민간 정원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자연관과 철학적 사유가 깃든 은밀(隱逸)의 공간이다. 

백운동 원림은 월출산 옥판봉의 남쪽 경사지의 맨 아래 자리하며, 월출산에서 시작한 계곡이 백운동 원림의 서쪽을 북에서 남으로 흘러 안운저수지에 닿고 다시 금강천으로 이어진다. 또 동쪽에 월출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가 물줄기를 이루었고 북쪽은 현대에 들어 상업적 농장인 강진 월출산 다원이 넓게 조성돼 있다. 숲이 우거지고 계곡이 깊어 멀리에서는 쉽게 찾기 힘들 정도다.

조선 전기까지 백운동(혹은 白雲寺)이라는 암자 터로 존재해 왔으나 1670년경 이담로가 은거를 위한 별서(別墅)로 새롭게 조영한 곳이다. 집안 기록에 따르면 이담로는 둘째 손자 이언길과 함께 1692년경 백운동 별서에 들어와 살았고, 이후 이언길의 큰아들 이의권의 가족 모두가 이곳으로 옮겨옴으로 주거형 공간으로 변모됐다. 특히 훼손하거나 남에게 넘기지 않고 11대에 걸쳐 현재까지 잘 보존해 오늘에 이르고 있어 의미가 크고 유서 깊은 곳이다.

◆다산 정약용과 인연 맺어진 곳

이곳은 원림으로서 가치도 있지만 다산 정약용과 이담로의 후손들이 차를 소재로 깊은 인연을 맺었던 곳이다. 또 다산에서 초의와 이시헌으로 이어지는 인간적 교류와 차를 통한 소통의 흔적들을 잘 살필 수 있다. 이들은 차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조선 후기의 차 문화를 부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담로의 6대손 이시헌은 이 공간과 다산과의 인연으로 다산의 막내 제자가 됐다. 그는 다산이 해배된 이후에도 백운동 대숲에서 나는 찻잎을 따서 떡차를 만들어 다산에게 보냈던 인물이다. 다산은 그에게 차 만드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일러준 바 있고 많은 서신을 주고받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제다법을 기초로 해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시판차인 백운옥판차가 만들어지게 됐고 현재까지 이어져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백운동 원림의 진입부에는 동백나무가 우거지고, 백운동이라는 글이 새겨진 큰 암괴(巖塊)가 있다. 계곡과 창하벽, 정유강, 정선대, 취미선방 등이 쉽게 인식돼 백운동 원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백운동 원림의 풍류는 예원진만 못함이 없고 명승은 고중영의 그것보다 낫다”고 했다. 특히 5대 동주인 이시헌 역시 도홍경의 화양과 왕마힐의 그림 속 마을과 같고 도원이 부럽지 않다고 해 백운동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백운동 원림. (제공: 강진군) ⓒ천지일보 2021.5.14
백운동 원림. (제공: 강진군) ⓒ천지일보 2021.5.14

◆수많은 시인묵객들 찾은 교류의 장

호남의 3대 정원이라 할 수 있는 백운동 별서원림은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교류의 장이었다. 정원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시적 의미가 함유된 경관과 정원의 구성 요소들은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와서 보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 됐다. 이들은 이곳을 찾고 많은 시문을 남겼다. 신명규, 남구만, 임영, 김창흡 형제, 정약용, 초의선사, 황상 등이 대표되는 인물이다.

이시헌이 정리한 ‘백운세수첩(白雲世守帖)’에는 역대 명사들이 백운동을 노래한 연작시들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해 백운동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전통 별서 중 기록이 가장 풍부한 편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운동 5대 주인 이시헌은 그의 글에서 자신이 임신년(1812)에 스승 다산과 친구들이 월출산에 올랐던 일을 회고하고 있다. 이는 어린 이시헌과 제자들이 다산을 따라 1812년 5월에 월출산을 다녀온 것을 기록한 것으로, 다산첩을 구성한 1812년 9월은 이 등반 이후에 초의·윤동 등과 백운동을 방문하고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또 서신을 통해 차를 보내줄 것과 차 제조법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는 것, 공부에 대한 당부 등을 읽을 수 있다. 다산은 이를 계기로 백운동 12경을 친필 시로 쓴 후 초의에게 백운동도(白雲洞圖)와 다산초당도(茶山草堂圖)를 그리게 한 후 자신의 친필 시를 합첩한 백운첩(白雲帖)을 남겼다.

다산과 초의 두 사람이 모두 백운동 원림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음은 이곳이 예사로운 공간이 아님을 입증한다. 두 사람의 곁에는 추사와 혜장스님이 있다.

백운동 원림은 이담로가 ‘살아서는 집짓기에 마땅하고 죽어서는 넋을 묻히기에 마땅한 곳’이라고 한 곳이다. 즉 생활의 공간이 자리한 본체 뒤 언덕에 입동조인 이담로와 부인의 묘가 자리하고 있으며 정선대 하단에는 이시헌의 묘소가 있다. 뿐만 아니라 백운동 경역을 산보하다 보면 곳곳에 묘지를 볼 수 있어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안식처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조선 시대 사대부가에서 대지 안에 대부분 사당(家廟)이 있고 묘지는 가까이 있지 않은데 이처럼 묘소가 생활공간이면서 별서인 한 영역 내에서 아주 가까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백운동 원림에서 계곡물을 끌어들여 마당을 돌게 하는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인공을 가미한 의지를 볼 수 있다. 매화, 난, 국화, 대나무, 연, 소나무, 동백, 모란, 영산홍, 단풍, 생달나무, 유자나무 등 다양한 정원의 식물이 자리하고 있다. 

또 최초의 정원 조성자 이담로는 ‘백운동유서기(白雲洞幽棲記)’에서 연과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 난초를 기술하고 학(鶴)과 거문고(琴)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식물 이외에도 학과 거문고를 서술함은 조경 식물과 선비의 고고함을 상징하는 학과 풍류를 보여주는 거문고의 어우러짐으로 이들 하나하나가 이 공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임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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