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공존논리(共存論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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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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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전쟁도 인류에게 엄청난 재난과 정서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고대 그리스인도 마찬가지였다. 헥토르의 장례를 치를 때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피눈물을 흘리며 애도사를 읽었고,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에게 죽은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크로세우스는 딸을 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후 아폴론에게 기도를 했으며,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달라고 애걸했다. 모두 전쟁이 그리스인의 영혼에 상처를 주었지만, 신기하게도 전쟁으로 인한 고통이 호머의 서사시에서는 주선율을 형성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짙은 호전적 분위기와 상무정신으로 해소돼 사라진다. 상무정신과 전쟁에 대한 혐오감이 공존하는 시경과의 차이점이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전쟁은 생존을 위해 중요한 과제로 재화를 획득하려는 욕망이 전쟁에 대한 공포를 훨씬 능가했다. 그것이 현대 서양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로 이어졌고 결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촉발했다.

동아시아에서 침략과 전쟁을 생존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민족은 일본인이다. 일본인은 그리스에서 시작된 서양인의 전쟁관과 다르지 않았다. 치열한 내전을 통해 당시 세계최강의 육군을 건설한 그들은 무력으로 생존공간을 확장하려는 꿈을 확장했다. 그것이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이 아니라 공존이라는 방법으로 생존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까? 전쟁을 최선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끊임없는 물질적 욕구를 다른 가치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사명대사는 이러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답을 제시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 전후의 마무리를 위해 조정의 관료가 아니라 출가승인 그가 일본으로 파견된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의 새로운 집권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약육강식이 난무했던 당시 일본의 시대적 상황을 가장 처절하게 겪은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인질생활을 했으며 결혼도 정략에 따라야 했다. 밑바닥에서 최고 권력자가 됐던 히데요시가 과대망상으로 멸망하는 것을 지켜본 그는 무력이 최고의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력은 무력을 견제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 그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오자 깊은 대화를 나눴다.

논의의 핵심은 전쟁을 없앨 수 있는 장기적인 방안이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사는 불교가 지닌 공존의 논리를 설파했다. 대사가 일본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찾은 곳이 해동의 화엄종찰 부석사였다. 무량수전 앞에 단아하면서도 장엄하게 서있는 안양루(安養樓)는 사명대사가 처음 세웠다는 말이 있다. 무량수전이 사후에 가는 아마타불의 극락세계라면 안양루는 이승에서 부처님의 자비로 이룩된 이상세계이다. 화엄의 ‘화(華)’는 여러 가지 종류의 꽃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장면을 가리키며, ‘엄(嚴)’은 그러한 세계가 시공의 세계를 넘을 정도로 장엄하게 유지되는 것을 가리킨다. 화엄의 핵심인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은 개체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전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공존의 철학이다. 대사가 부석사를 찾은 것은 일본과 조선이 화엄의 세계에서 공존하는 현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해 질 무렵 부석사 안양루에 올라 보면 황금빛 석양과 끝없이 이어진 산자락이 장관이다. 화려하고 장엄한 화엄세계가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이다.

공존은 현실적 논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그들에게 아무리 공존을 호소해도 먹고 남은 찌꺼기나 던져줄 뿐이다. 공존이 자신에게 행복을 준다는 것을 느끼려면 강력한 종교적 체험이 필요하다. 대사는 이에야스와 일본의 집권층에게 외교적 이해관계를 설명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대사를 파견한 조선의 선택은 절묘한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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