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건희 전 회장의 기증품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국보 제216호인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제공: 문화체육관광부) ⓒ천지일보 2021.4.28
고(故) 이건희 전 회장의 기증품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국보 제216호인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제공: 문화체육관광부) ⓒ천지일보 2021.4.28

文 “별도 시설 설치” 언급에

서로 “우리 지역으로” 팽팽

 

낙후도시→세계적 문화도시

한국판 ‘빌바오 효과’ 해석도

 

출생지·초교·본사 소재지 등

지역마다 ‘삼성 인연’ 내세워

 

실현 불투명 속 경쟁만 과열

“예술 균형발전 위해 나눠야”

[천지일보=전국 특별취재팀] 고(故)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2만 3000여점에 달하는 미술 소장품을 전시할 일명 ‘이건희 미술관’과 관련, 전국에서 치열한 유치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이 회장의 미술품 기증과 관련해 많은 국민이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별도의 전시실이나 특별관을 설치하는 방안 등을 주문했다.

문화체육관광부도 현재 기존시설에 예술품을 담을 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관계로 이를 위한 미술관·박물관·수장고(작품이 보관되는 장소) 건립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내용이 언론에 발표되자마자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는 앞다퉈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대구·부산·진주·용인 등 이 회장과 인연이 있는 지자체마다 ‘출생지’라던지 ‘창업주 다닌 초등학교 소재지’ ‘삼성 본사 있는 곳’ 등 각양각색의 명분을 들고나왔다.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위한 범시민 서명에 나선 곳도 있다.

이는 경제위기 속 낙후된 스페인 지방의 한 공업도시 빌바오를 세계적인 문화관광도시로 도약시킨 이른바 ‘빌바오 효과’를 누리기 위한 열망이 깔려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미술관 건립으로 부활한 ‘빌바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스페인 서북부 바스크 지방 빌바오에 있는 근현대 미술관이다. 한때 철강과 조선산업으로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로 발달했던 빌바오는 1970~1980년대 해당 산업이 붕괴하면서 지방의 낙후된 공업도시로 전락했다. 최근 당면한 한국의 조선산업 위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때 35만명 규모의 인구를 근근이 이어가던 빌바오를 탈바꿈시킨 것은 대규모 정부 공모사업이나 대단한 프로젝트가 아닌 근현대 미술관 건립이었다. 악화일로를 걷던 빌바오 시는 1997년 들어선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한해에만 100만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문화도시로 부활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다. 당시 바스크 지방정부가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을 통해 1억달러 규모의 미술관을 유치한 이 결정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의 한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 지방정부도 어쩌면 코로나 사태와 ‘인구재앙’이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빌바오 효과’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경자의 대표작인 ‘꽃과 나비’. (제공: 전남도청)
고(故) 이건희 전 회장의 기증품인 천경자의 대표작인 ‘꽃과 나비’. (제공: 전남도청)

◆지역별 유치전략도 ‘각양각색’

‘이건희 미술관’이 단순한 시설 건립을 넘어 지역경제를 부흥시킬 소재로 떠오르면서 지자체마다 갖가지 유치전략을 세우는 등 경쟁이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먼저 대구시는 고 이건희 회장의 출생지이자 삼성그룹이 태동한 곳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과거 대구 인교동에서 모태회사 격인 삼성상회를 창업했으며, 주요 계열사 제일모직을 비롯한 삼성창조캠퍼스 등을 칠성동에 설립했다는 이유에서다.

국내 유일한 국립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은 4개관으로 운영 중이지만 이미 3개관이 수도권에 몰려 있어 지역민들의 문화적 박탈감이 심각하다는 점도 지목했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만약 ‘이건희 컬렉션’이 한곳에 모여 국민께 선보인다면 그 장소는 당연히 창업주가 창업했고 이건희 회장이 태어난 대구여야 한다”면서 “대한민국 근대미술의 기반을 다져온 대구의 문화적 저력을 바탕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찾아오는 문화명소로 만들어나가겠다”고 피력했다.

경남 진주시도 문화 발전을 위한 고인의 유지를 살리고 예술의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권이 아닌 영호남을 아우르는 지역에 건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진주는 지리적으로 남부권의 중심이며 부산·울산·대구·광주 등 영호남 대도시권에서도 1~2시간 만에 올 수 있어 미술관 건립에 가장 적합하다는 설명이다.

또 진주 지수면은 기증자인 이 회장의 선친이자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유년 시절 다녔던 지수초등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LG 구인회 회장, GS 허만정 선생, 효성 조홍제 회장 등을 배출하면서 ‘기업가 정신’이 태동한 터전이라는 점을 시는 내세웠다. 실제로 진주시는 지난 2018년 7월 한국경영학회로부터 ‘대한민국 기업가 정신의 수도’로 지정되면서 선포식을 개최하기도 했다.

조규일 진주시장은 “우리나라는 문화예술시설이 수도권과 대도시 위주로 편중돼 있다”며 “문화 혜택에서 소외된 지방에도 새로운 문화시설을 설치해 많은 국민이 문화예술을 누리는 ‘문화 민주주의’를 실천해달라는 것이 기증자의 진정한 뜻”이라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보물 제1393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제공: 문화체육관광부) ⓒ천지일보 2021.4.28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보물 제1393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제공: 문화체육관광부) ⓒ천지일보 2021.4.28

경기 용인시와 수원시도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용인시는 고 이병철 회장의 소장품을 볼 수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호암관이 있어 이건희 미술관이 건립되면 대를 이어 수집한 삼성 컬렉션의 ‘원스톱 관광’이 가능해진다고 제안했다.

백군기 용인시장은 “삼성그룹 창업주가 자신의 호를 딴 호암관을 용인에 건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면서 “고 이건희 회장의 ‘세상에 우연은 없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라’는 말처럼 호암으로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겨 미술관 유치를 위해 힘쓸 것”이라고 발표했다.

수원시는 삼성전자 본사와 고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삼성가 묘소가 수원에 있다는 이유를 들어 미술관을 수원에 유치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아울러 이건희 컬렉션 중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과 관련한 작품들이 다수 있으며 인천공항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접근하기 편한 교통망을 갖췄다는 점도 꼽았다.

특히 경남 창원시는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위한 범시민 서명에 돌입했다. 지난달부터 25만명 목표로 범시민 서명을 벌이고 있으며 현재까지 온라인 1만 4346명, 오프라인에서 1200여명이 서명한 상태다.

허성무 창원시장은 최근 중앙부처와 국회를 찾아 이건희 미술관을 국립현대미술관 창원관(가칭)에 조성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김경수 경남지사가 참석한 지역 현안 간담회에서도 이건희 컬렉션은 창원이 최적지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회장 기증품이 모두 들어갈 만한 신규 전시관과 수장고를 위한 부지가 이미 확보됐다는 점도 그 이유로 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중섭의 '황소' (제공: 문화체육관광부) ⓒ천지일보 2021.4.28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이중섭의 '황소' (제공: 문화체육관광부) ⓒ천지일보 2021.4.28

울산시도 ‘이건희 컬렉션’ 유치전략을 세우고 있다.

송철호 울산시장은 11일 ‘이건희 컬렉션’의 울산 전시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과 만나 오는 12월 개관 예정인 울산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 추진단장은 “미래형 미술관이라는 정체성에 맞는 미술관 개관전시를 준비하고 있다”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내년 ‘이건희 컬렉션 전국 순회 전시’를 계획 중인 만큼 울산에 유치될 수 있도록 적극 협의하겠다”고 전했다.

박형준 부산시장도 이달 들어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건희 미술관, 부산에 오면 빛나는 명소가 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박 시장은 “서울공화국이라는 말처럼 문화의 서울 집중도가 극심한 상황”이라며 “수도권에는 삼성 리움 미술관과 호암미술관도 있다. 서울에 있으면 지방이 보이지 않는가 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문화 발전을 위한 고인의 유지를 살리려면 수도권이 아닌 남부권에 미술관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며 “국제관광도시 부산은 북항에 세계적인 미술관 유치 계획도 있다”고 했다.

이밖에 안산시도 김홍도의 고향인 점을 들어 관련 작품은 ‘단원의 도시’인 안산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문체부에 요구했다. 안산시는 김홍도의 ▲사슴과 동자 ▲화조도 ▲임수간운도 ▲대관령 ▲신광사 가는 길 ▲여동빈도 ▲공원춘효도 등 7개 작품과 단원의 스승 강세황, 아들 김양기, 최북 등 관련 인물 작품 16건도 소장 중이다.

이처럼 유치경쟁이 뜨거워지고 있지만 정부가 미술관에 대한 뚜렷한 계획을 내놓지 않아 실현 여부조차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자칫 지역 간 경쟁만 심화되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지역 미술계 관계자는 “고인의 기부 취지를 살리고 예술의 균형발전을 위해 컬렉션을 지역에 균등하게 나눈다면 많은 국민이 문화예술을 누릴뿐 아니라 관광 등 지역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중섭 작가의 은지화. (제공: 광주시청) ⓒ천지일보 2021.4.28
고(故) 이건희 전 회장의 기증품인 이중섭 작가의 은지화. (제공: 광주시청) ⓒ천지일보 202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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