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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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서옥은 소흥(紹興)에서 유명한 사옥이었다. 12세에서 17세까지 이곳에서 수경오(壽鏡吾)로부터 고문을 익힌 노신(魯迅)은 훗날 중국문단의 정상에 올랐다. 지금은 노신의 생가에서 작은 돌다리를 건너면 삼미서옥이다. 20세에 수재(秀才)가 된 수경오는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노신이라는 영재를 얻어서 가르쳤으니, 수선생은 웃으며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수씨의 선조는 소흥성 편문(便門) 밖에서 술집을 경영해 부를 쌓았다. 그러나 수경오의 조부가 성안으로 이주해 가업을 계속하면서 집안이 기울었다. 수경오가 서옥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이미 대부분의 건물이 팔리고, 배방(配房) 하나만 남았다. 삼미서옥은 동배방에 해당했다. 그러나 약 200년 전인 청의 가경 연간에 개설된 이후 지금까지도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남은 건물은 작고 질박하지만, 대단한 품격을 갖추고 있다.

서옥의 대들보에는 삼미서옥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처음에는 수경오의 조부 수봉람(壽峰嵐)이 당시 유명한 서예가 양동서(梁同書)에게 받은 삼여서옥(三餘書屋)을 걸었다. 삼여는 삼국시대 동우(董遇)가 말한 ‘겨울에는 연말까지 날짜가 남았고(冬者歲之餘), 밤에는 해가 뜰 때까지 시간이 남았고(夜者日之餘), 비가 내리면 맑을 때까지 틈이 남았다(陰雨者晴之餘)’에서 비롯됐다. 모두 독서할 좋은 기회를 가리킨다. 소동파도 이 ‘삼여’를 즐겼다. 나중에 수봉람은 양동서가 쓴 여(餘)를 지우고, 자신이 미(味)라는 글자를 적었다. 그의 증손 수수린(壽洙隣)에 따르면, 삼미는 경전은 쌀 맛, 사서는 고기 맛, 제자백가는 식초 맛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후원에는 조맹부(趙孟頫)가 쓴 ‘자이(自怡)’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나는 원래의 뜻과 무관하게 내키는 대로 ‘자유를 즐기는 즐거움’이라고 풀이한 후 흐뭇하게 웃었다. 벽에는 수봉람의 친필로 알려진 시 한 수가 적혀 있는데, 100년이 지난 후라서 모두 식별하기는 어렵다. 간신히 보이는 것만 적으면, ‘10년 동안 꽃을 가꾸었는데도 볼 수 있는 것은 고작 열흘, 주렴 사이로 보이는 봄햇살이라도 가벼이 여기지는 않아야지’라는 뜻이다. 서방에 있는 등잔은 모두 학생들이 가져온 것들이다. 노신이 공부하던 책상은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데 그 위에는 조(早)라는 글자가 있다. 노신이 새긴 좌우명이다. 조의 반대는 만(晩)이니, 공부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각오인 듯하다.

선생의 강단은 정중앙에 있는 책상과 의자 한 벌뿐이다. 수경오선생은 노신을 총명하고 고귀한 품격을 지닌 독서세가(讀書世家)의 자제라고 높이 평가했다. 노신도 선생이 소흥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고 존경했다. 두 가문은 도창방(都昌坊) 입구 작은 하천을 두고 이웃하며 100년의 우의를 유지했다. 주하수(周遐壽)는 수경오 선생에 대한 일화를 기억한다.

“어느 날 선생께서 졸고 계시다가 갑자기 일어나며 집안에 큰 새가 한 마리 들어왔다고 소리쳤다. 자세히 살펴보니 선생의 돋보기안경 겉에 죽은 모기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학생들이 크게 웃자, 선생께서도 빙그레 웃었다. 선생의 집안은 매우 검소했다. 여름이 되면 단 벌 삼베두루마기를 서옥의 기둥에 걸어 두었다. 성년이 된 두 아들이 있었다. 하나는 키가 크고, 하나는 작았다. 외출할 때는 삼부자가 번갈아 입었는데, 큰아들이 입으면 짧았고, 작은아들이 입으면 길었다.”

노신은 조화석습(朝花夕拾)에서 선생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사타족 출신의 무장 이극용(李克用)이 금잔에 술을 마시면 천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는 노래를 부르던 장면을 회고했다. 선생은 고목처럼 이 좁은 서옥에서 60년이나 앉아 있었다. 삼미서옥은 배처럼 많은 학생들을 지식의 피안으로 실어 날랐다. 삐쩍 마르고 키가 후리후리한 사숙 선생 수경오는 여전히 서옥을 지키다가 나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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