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3층 강당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의거 제89주년 기념식이 열린 가운데 주요 참석자들이 단체기념촬영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1.5.5
지난달 29일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3층 강당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의거 제89주년 기념식이 열린 가운데 주요 참석자들이 단체기념촬영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1.5.5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지난달 29일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3층 강당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의거 제89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행사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렸으며, 국민의례와 이성섭 상임이사의 약전봉독, 명노승 기념사업회장 기념식사,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의 기념사, 조정숙씨의 유서봉독 순서로 진행됐다.

기념행사 이후 백일장 수상자인 김봄(등대글로벌스클 2학년)학생의 낭독과 테너 김현욱과 소프라노 윤선경의 축하공연이 이어졌고, 황길수 명예회장의 만세삼창으로 행사가 마무리됐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는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 겸 전승축하기념식이 열린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현재는 루쉰공원으로 변경)에서 폭탄을 터트려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가 죽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도록 한 거사였다.

이 의거에 대해 중국 총통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감동을 받아 제2차 세계대전 말 전후처리문제를 사전협의하기 위해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로 인해 많은 식민지 국가 중 유일하게 우리 조선만이 전후 즉시 독립할 수 있었다.

윤봉길 의사 선서장면.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19.12.2
윤봉길 의사 선서장면 ⓒ천지일보DB

윤 의사는 상해의거 후에 체포돼 5월 25일 상하이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11월 18일 일본으로 압송돼 가나자와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윤 의사는 총살 후 시영묘지관리사무소와 쓰레기 소각장 사이 좁은 통로에 표식도 없이 암매장됐고, 이는 광복 직후 유해 발굴 작업을 통해 1946년 5월 15일 국내로 봉환, 7월 6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당시 윤 의사를 비롯해 이봉창, 백정기 의사도 함께 발굴 작업을 통해 효창공원에 나란히 안장됐다.

윤 의사가 암매장됐던 장소에는 1992년 암장묘비가 설립됐고, 지금까지 매헌윤봉길의사암장지보존회에 의해 관리되어 오고 있다.

윤봉길 의사의 친조카인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은 본지 기고를 통해 “윤봉길이 헌병대 심문에서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해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며 이로 인해 강국 피폐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라고 밝힌 것처럼 의거 후 7년이 지난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또 13년 뒤인 1945년, 일본은 패망하고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4월 29일 ‘기미가요’를 중시시킨 홍구공원의 폭탄소리는 일제패망의 전주곡이었다”고 말했다.

또 “그간 윤봉길의거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으로만 평가됐으나 윤봉길의거 선서문에서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고 거사 목적을 밝혔듯이 윤봉길의거는 당시 침략전쟁을 일삼으며 세계평화를 파괴하던 일본제국주의 전쟁범죄자 집단을 응징한 세계평화운동”이라면서 이에 “윤봉길의거는 독립평화운동으로 재평가돼야한다”고 강조했다.

1932년 5월 1일자 도쿄니찌니찌신문 호외에 보도됐던 윤봉길 의사 연행 모습. 흐린 날씨와 필름 전송 과정에서 발생된 문제로 윤 의사 얼굴과 중절모자 수정처리해서 보도됨 (제공: 윤주) ⓒ천지일보 2019.8.15
1932년 5월 1일자 도쿄니찌니찌신문 호외에 보도됐던 윤봉길 의사 연행 모습. 흐린 날씨와 필름 전송 과정에서 발생된 문제로 윤 의사 얼굴과 중절모자 수정처리해서 보도됨 (제공: 윤주) ⓒ천지일보 2019.8.15
1946년 3월 6일 40여명의 유해발굴대원이 일본 가나자와시에서 윤봉길 의사 유해발굴작업을 벌이는 가운데 유해가 발견되자 모든 대원들이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순간이다. (제공: 윤주) ⓒ천지일보 2021.5.5
1946년 3월 6일 40여명의 유해발굴대원이 일본 가나자와시에서 윤봉길 의사 유해발굴작업을 벌이는 가운데 유해가 발견되자 모든 대원들이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순간이다. (제공: 윤주) ⓒ천지일보 20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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