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김덕수
꿈에 누런 똥이나 돼지를 보면 횡재수가 있다고 합니다. 혹 독자 여러분께서는 그러한 경험을 하신 적이 있나요? 그럼 왜 똥인 오물과 재물 즉 돈이 동일시 될까요? 답은 의외로 쉽게 풀립니다. 똥과 돈은 밀접한 공통점이 있어요. 둘다 한 곳에 많이 쌓아 두면 곧 썩고 부패해 심한 악취를 풍깁니다.

그러나 잘 삭혀서 골고루 뿌려주면 땅과 세상을 윤택하게 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비닐하우스의 등장으로 인류는 영농의 혁명을 이루었고 그래서 인류역사상 곡물생산량이 그 소비량을 능가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영농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해도 땅속에 유기물 곧 땅을 기름지게 할 비료가 들어가지 않으면 소출은 증대될 수 없어요.

녹색혁명을 이루기 한 세대 전만 해도 거름은 식물을 썩힌 퇴비와 동물의 배설물을 삭힌 것이 전부였어요. 그래서 땅과 물이 오염될 리 없었습니다. 우리말 속에 똥독이니 돈독이니 하는 표현들이 있어요. 갓난 애기들 기저귀를 조금만 늦게 갈아줘도 애기들 엉덩이가 쉬 짓무르는 것이 똥독의 영향입니다. “저 사람은 돈독이 올랐어”라고 하면 인간성이 지나치게 돈만 밝히는 쪽으로 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조금만 여유를 갖고 성찰해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왜 같은 물질도 쓰기에 따라 세상을 윤택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고 부패되어 스스로도 상하게 하며 더 나아가 세상을 오염시킬까요? 우리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어요. 물론 德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가시적 효과는 재물이 더 드러나기에 이러한 속담이 생겼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실 속에서 인정해야만 하는 불편한 진실이 상존한다는 겁니다. 많이 가진 자일수록 대개는 공익적 돈 씀씀이(베풂과 나눔)에 인색하다는 겁니다.

큰 재물일수록 그 쓰임이 사사로움을 초월하면 사회를 윤택하게 또 그 사회공동체구성원들을 활기차게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재산이 백억이 넘고 천억이 넘어갈수록 사회나 공동체에 대한 베풂이나 호혜적 보시에 인색해진다는 사실이죠. 자본주의체제에 경도된 사람들일수록 예외 없이 그 과정을 답습해 갑니다.

미국 워렌 버핏 씨나 빌게이츠 씨는 기부를 많이 하기로 유명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보시라는 불교적 관점과 적선이라는 전통적 가치관에서 보자면 매우 낮은 차원의 행위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타인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행위가 오히려 복을 짓는 것이 아니라 복을 까먹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불교에서는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이야기하고 우리의 전통적 정서는 ‘적선을 해라’입니다. 적선도 음덕을 쌓으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모르게 선행을 쌓고 쌓아 가면 그 집안과 후손이 흥할 수밖에 없겠죠. 특히 물질과 재물을 베풀 때 정말 신중해야할 점이 있어요. 베풂을 받는 쪽을 수치스럽게 하거나 조건을 달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 속엔 남에게 도움을 받거나 구걸을 할 때는 누구나 근원적 부끄러움이 내재되어 수치스러움에 노출되게 됩니다.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부끄러움 말입니다. 그 근원적 부끄러움을 갖고 있는 약자에게 수치심을 강요하거나 조건을 붙인다는 것을 물리적 폭력보다 심한 모멸감을 안겨 줍니다. 차라리 베풀지 않으니만 못하다는 것이죠. 불교의 무주상 보시도 같은 맥락입니다.

요즘 불자들 치고 절집에 큰 시주를 하고도 티내지 않고 겸손한 신도는 참 드물어진 것이 오래됩니다. 옛날엔 보시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 다 차원이 높았어요. 자신의 富나 선행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또는 티내기 위해 하는 행위는 참된 베풂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가난한 자들과 세상의 소외된 이들을 이용해 먹는 잔인한 죄요, 폭력인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조상의 유골을 옮겨 거창한 호화분묘를 조성하는 행위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더군요.

가장 드러나지 않게 조용하게 수혜자가 느끼는 수치심을 최소화해 그 받은 것을 다시 세상에 되돌리는데 자기계발과 분발의 밑천으로 그 부끄러움을 승화시키도록 배려하는 섬세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다운 베풂과 나눔은 무소유심에서 우러납니다. 즉 너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바탕을 둔 우리라는 의식의 확립 속에서 청백리도 나오고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신 스님들도 계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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