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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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런던올림픽 육상 남자 400m와 1600m에서 역사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의족을 한 남아공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가 정상적인 선수들과 함께 출전해 기량을 겨뤄 세계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400m 예선 1조에서 45초 44로 5명 중 2위로 2차 준결선에 올랐다. 준결선에선 46초 54를 기록해 8위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1600m 계주에선 1차 준결선에서 남아공 3번 주자로 대기하다가 2번 주자 동료가 갑자기 넘어졌으나 국제육상연맹이 케냐 선수의 실수로 비롯됐다고 판정을 하는 바람에 결선에 올랐다. 남아공은 결선에서 최종 9개팀 중 8위에 머물렀다. 비록 그는 정상인들과 겨뤄 입상을 하지 못했지만 의족 스프린터로서 장애를 극복하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가슴 따뜻한 스토리를 선사해 많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이미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서도 비장애인 선수들과 겨뤄 남자 400m 준결승까지 진출했으며, 남자 1600m 계주 예선에 참가해 소속팀이 2위를 함으로써 장애인 선수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을 획득하는 기록을 세우고 남아공의 영웅이 됐었다. 2012년 런던 장애인 올림픽 대회에서도 남자 400m 계주 금메달, 남자 2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는 장애인 선수로서는 최정상급 실력을 과시한 바 있었다. 장애인 스프린터로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그였지만 2013년 사귀던 여자친구를 총으로 쏴 죽여 살인범으로 체포돼 수년에 걸쳐 재판을 받은 끝에 2018년 최종 13년간의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해야 하는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우러러 보던 영웅이 죄인으로 전락한 모습은 선과 악이 교차하는 삶의 이중성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도전정신은 여러 장애인 선수들에게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미국의 블레이크 리퍼(32)도 그런 선수들 중 한 명이다. 그는 피스토리우스가 의족을 달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모습을 본 뒤 자신도 패럴림픽이 아닌 하계올림픽에서 뛰는 걸 열망했다. 2019년 미국 육상선수권대회 400m에서 5위를 차지한 리퍼는 같은 해 세계 육상선수권대회에서 출전 자격을 얻어 계주에 출전했다. 피스토리우스와 같은 길을 걸으며 올림픽 출전을 점차 가시화 시켰다.

하지만 그에게 지난 27일 세계육상연맹으로부터 난데없는 족쇄령이 내려졌다. 도쿄올림픽을 포함한 공식 경기 출전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세계육상연맹은 “외부 인사로 구성한 기술분석팀이 리퍼가 제출한 의족을 세밀하게 살핀 결과 ‘리퍼가 제출한 의족이 경기력 향상에 기대 이상의 도움을 준다’고 분석했다”라며 “연맹은 분석 결과에 따라 ‘리퍼는 현 상황에서 올림픽과 세계육상연맹이 주관하는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고 밝혔다.

흑인인 리퍼는 태어날 때부터 양쪽 다리가 짧았다. 그의 부모는 의족을 마련해 리퍼가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를 즐기게 했다. 의족을 달고 운동을 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점차 육상에 적응해 나가며 피스토리우스처럼 올림픽 무대를 밟고 싶었던 그의 꿈은 세계육상연맹의 결정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리퍼측은 올림픽 등에 자신의 출전을 불허하는 것은 인종, 장애를 넘어 인간의 평등을 실현해야 할 올림픽의 이상과 가치에 어긋날 뿐 아니라 과학적인 근거도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공정한 기회와 권리부여라는 측면에서도 리퍼의 출전 제한은 다시 한번 생각해볼 문제라고 본다. 2012년 런던올림픽 때보다 장애인 선수들에 대한 참여가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전 세계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올림픽을 생각한다면 리퍼에 대한 출전을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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