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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일제의 한국강제병합 이래 우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위업을 이룬 윤봉길의거 89주년를 맞아 그 의거를 재조명해본다.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해 약 2개월간 임시정부와 주변 상황을 살펴본 윤봉길은 크게 실망했다. 당시 임정은 청사 임대료를 지불하지 못해 집주인으로부터 피소당할 만큼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으로 겨우 이름만 유지했다. 게다가 동년 7월 2일 만주 길림성에 있는 만보산 지역에서 우리 조선인들과 중국인들 사이에 수로문제로 만보산사건이 발생해 중국인의 반한감정이 고조됐다.

이에 윤봉길은 암담한 심정을 한시로 남겼다. 일찍이 서울의 달빛 아래 술에 흠뻑 취했는데(淋漓痛飮漢城月)/지금 상하이의 가을에 슬픈 노래 부르며 울분을 토하네(慷慨悲歌滬市秋).

혁명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윤봉길은 세계혁명사를 공부하며 혁명을 도모할 목표를 세우고 상해영어학교를 다니며 미국 유학준비를 했다.

일제는 만보산사건의 간계로 중국 침략을 노골화 시킴으로, 기어이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그해 11월경 만주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했다. 이어 상하이 마옥산에서 일본인 승려가 괴한으로부터 습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관동군의 사주로 벌어진 사건이었으나 일제는 적반하장으로 이 사건을 구실로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세계이목이 상해로 집중되고 중국인의 반일 감정도 고조되자 조국독립을 위한 혁명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깨달은 윤봉길은 도미유학 계획을 포기하고 혁명의 길로 나아간다.

혁명을 결심한 윤봉길은 동생 남의에게 편지를 보냈다. “상해사변이 확전될 것 같다. 이대로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

남의에게 온 편지를 본 어머니 김원상 여사는 “집은 걱정마라. 너의 길을 가라”는 뜻을 담아 회신했다. 자식의 ‘죽음의 길’을 만류치 않은 김원상 여사. 윤봉길의 의기와 기개가 누구로부터 물려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혁명의 뜻을 굳힌 윤봉길은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는 것에 주력했다. 전차검표원 계춘건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그와 함께 매일 오후에 공동조계의 홍구시장에 나가 장사를 시작했다. 홍구는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일본영사관이 있어 일본군 동정과 정보를 파악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그 무렵 동지 유진만의 집에 갔다가 그로부터 이봉창의사에게 폭탄을 마련해준 사람이 김구라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임정에 대해 크게 실망한 윤봉길의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김구 선생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마침내 윤봉길은 4월 24일 일본 교민신문인 ‘일일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천황 탄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사변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개최’한다는 기사였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축하식을 거행한다, 그날 식장에는 물병 하나와 점심으로 도시락 그리고 일본 국기 하나씩을 가지고 참석하라’는 내용이다.

그 즉시 윤봉길은 김구를 찾아가 거사의 뜻을 밝히고 폭탄을 준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윤봉길이 근무하는 모자공장을 김구가 자주 찾아와 시국문제를 토론해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 김구 선생이 마련해준 폭탄으로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대망의 의거를 결행했다.

바로 그 순간 윤봉길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영웅으로 우뚝 섰다. 이 의거는 윤봉길의 ‘국제정세를 보는 탁월한 통찰력과 조국독립의 확신’이 거둔 쾌거로 의도된 거사였다. 윤봉길이 헌병대 심문에서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해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며 이로 인해 강국 피폐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라고 밝힌 것처럼 의거 후 7년이 지난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또 13년 뒤인 1945년, 일본은 패망하고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29일 ‘기미가요’를 중시시킨 홍구공원의 폭탄소리는 일제패망의 전주곡이었다.

그동안 윤봉길의거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으로만 평가됐다. 그러나 윤봉길의거 선서문에서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고 거사 목적을 밝혔듯이 윤봉길의거는 당시 침략전쟁을 일삼으며 세계평화를 파괴하던 일본제국주의 전쟁범죄자 집단을 응징한 세계평화운동이다. 따라서 윤봉길의거는 독립평화운동으로 재평가돼야한다. 역사를 올바로 인식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사 선서장면.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19.12.2
윤봉길 의사 선서장면 ⓒ천지일보 2019.12.2
1932년 5월 1일자 도쿄니찌니찌신문 호외에 보도됐던 윤봉길 의사 연행 모습. 흐린 날씨와 필름 전송 과정에서 발생된 문제로 윤 의사 얼굴과 중절모자 수정처리해서 보도됨 (제공: 윤주) ⓒ천지일보 2019.8.15
1932년 5월 1일자 도쿄니찌니찌신문 호외에 보도됐던 윤봉길 의사 연행 모습. 흐린 날씨와 필름 전송 과정에서 발생된 문제로 윤 의사 얼굴과 중절모자 수정처리해서 보도됨 (제공: 윤주) ⓒ천지일보 2019.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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