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not caption

김일성회고록 출간으로 국내 이념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김일성을 말 할 때 “박정희는 과거에서 밀리고 김일성은 과거에서 앞선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탁월한 능력으로 대한민국을 근대화 시킨 인물이지만 과거 만주군에서 활동한 친일 경력이, 그리고 김일성은 과거 항일투쟁을 했지만 오늘 북한을 ‘인간생지옥’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지만 대체로 많이 날조됐다는 진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또 다시 그의 회고록 출판은 우리 사회의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최근 북한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사가 담긴 것으로 알려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8권 세트로 국내에서는 처음 출간됐다. 과거 북한에서 출간된 원전을 그대로 옮겼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 김일성 미화와 사실관계 오류 등 회고록 내용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고, 1990년대 회고록을 출간하려고 한 또 다른 출판사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은 적이 있어 이번 출간을 두고도 논란이 벌어질 전망이다. 4월 21일 출판계 등에 따르면 도서출판 민족사랑방은 지난 1일 김일성을 저자로 한 ‘세기와 더불어 항일회고록 세트’라는 이름의 책을 출간했다. 800여개의 국내 출판사가 조합원으로 가입한 출판인 단체 한국출판협동조합을 통해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여러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책을 판매 중인 것으로 확인된다.

지난해 11월께 출판사로 등록된 민족사랑방은 사단법인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을 지낸 김승균 씨가 대표로 있다. 김씨는 북한 관련 무역 등을 하는 중소기업인 남북교역 주식회사 대표이기도 하다. 김 씨는 한 언론사와의 통화에서 “논란이 있는 건 알지만 회고록은 김일성 주석이 어릴 때부터 학창 및 항일운동 시절까지 활동한 내용이라서 국내에서도 충분히 소개할 수 있다고 본다”며 “우리 헌법도 언론·출판 및 양심의 자유를 인정한다”고 말했다. 국가보안법 논란 등 우려에 관한 질문에는 “남한은 출판 허가제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저작권 문제에 관해선 “북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와 경제협력 사업 지원 등으로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그렇게 간단하게 마무리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사를 30년 넘게 연구한 중국 조선족 출신의 유순호 작가는 2017∼2018년 출간한 ‘김일성평전’에서 ‘세기와 더불어’가 사실을 왜곡한 부분이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 법조계 일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세기와 더불어’가 이적표현물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대법원이 “원심이 ‘세기와 더불어’를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단한 게 대표적인 근거다.

또 김일성이 숨진 직후인 1994년 8월에는 도서출판 가서원이 ‘세기와 더불어’를 국내에서 출판하려 했다가 출판사와 인쇄소가 압수수색을 당하고, 출판사 대표가 구속된 사례도 든다. 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 기준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면 부정하거나 체제전복 활동을 고무 또는 선동해 국가의 안전이나 공공질서를 뚜렷이 해치는 것”으로 “보편타당한 역사적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해 민족사적 정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에 해당하면 유해 간행물로 판단한다.

아닐세라 시민단체들은 23일 북한 김일성 주석의 항일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판매·배포를 금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서울서부지법에 냈다. 이들은 “김일성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도달해야 하는 한반도 이북을 강점한 뒤 6.25전쟁을 도발해 한반도 전체에 비합법적 비자유민주체제를 수립하려 한 전쟁범죄자이자 헌법 파괴의 수괴”라고 규정했다. 한편 하태경 의원은 “김일성 회고록은 상당부분이 허구인데, 미사여구를 동원했다고 해서 김일성 우상화 논리에 속아 넘어갈 국민은 없다”고 하면서 출간에 별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북한의 날조된 책 몇 권으로 흔들리진 않겠지만 일부 젊은 세대들의 이념적 혼란에 대해선 모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