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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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의 통치는 밝고 분명해야 한다. 때로는 군주 자신의 허물마저도 솔직히 드러내야 한다. 군주가 허물을 감추면 신하들도 거짓말을 한다. 요즈음 통치자들처럼 언론의 비판에 발끈하는 정도로는 화합은커녕 제대로 군주노릇도 하지 못했다. 화합을 위한 또 다른 요건은 관용이다. 제왕은 사냥을 할 때라도 몰이꾼을 삼면에 배치하고 다른 한 쪽은 비워둔다.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주는 관용이다. 승자의 관용은 화합을 위한 용단이다. 고대 로마인은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전성기 로마제국을 팍스 로마나라고 부른다. 로마 중심의 평화체제를 의미하는 최대의 극찬이다. 후대에 제국을 형성한 영국도 스스로 팍스 브리타니카라는 명칭을 붙였지만, 잔혹한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붙인 자화자찬에 불과하다.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도 냉전체제에서 공산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군사동맹적 성격이 짙었다.

팍스 로마나의 핵심은 점령지에 대한 관용정책으로 로마시민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군사력을 보강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시작됐다. 로마의 확장은 영토의 보존과 상업적 목적에서 비롯됐다. 중국에서처럼 국경 너머에 살던 이민족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국경을 침범했다. 확대된 국경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대 30개의 군단 18만명이 필요했다.

시민만으로 병력을 충원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로마는 속주의 지원병으로 보조부대를 조직했다. 보조병력은 군단병의 수를 넘지 못했으므로 합쳐도 30만을 넘지 않았다. 그것으로 확장된 국경을 지키기 어려웠으므로 신속한 병력의 이동을 위해 제국 전역을 관통하는 도로망을 구축했다. 보조병은 25년의 복무기간을 마치면 로마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카이자르에 이은 초대황제 아구스투스가 법률로 제정했다. 속주민의 로마화가 급속도로 진전됐다. 나중에는 속주출신의 황제까지 등장했다.

점령지의 로마화는 공정한 조세제도도 뒷받침했다. 속주세는 10%로 한정됐으며, 나머지 부정기적인 세금은 완전히 철폐됐다. 임기를 마친 속주 총독을 고발할 수 있는 권리도 인정됐으므로 총독은 속주민들에게 부담을 주는 정책을 임의로 시행하지 못했다. 속주민들은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서 과거보다 훨씬 윤택하게 살았다. 점령초기에는 부족장들의 통치권을 인정했으므로 지배층의 반발도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발도 있었다. 본국출신이 등용될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자 로마인들이 강하게 반대했다. 반대세력은 철학자 키케로와 카이자르가 총애한 부루투스였다. 셰익스피어는 줄리어스 시저에서 브루투스가 카리자르를 암살한 원인이 원로원을 무시하고 독재를 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후대인의 단선적 시각에 불과하다.

키케로와 부루투스 등 보수파는 카이자르의 팍스 로마나보다 본국의 속주 지배를 지지했다. 그러나 카이자르는 로마의 번영과 항구적 평화를 위해 속주와 공동운명체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이자르의 암살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거대한 물결을 막지 못한 보수파의 몸부림이었다.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카이자르를 이해했다. 암살자들이 며칠 만에 제거된 것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이자르의 생각은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게 계승됐다. 팍스 로마나가 가능했던 또 다른 원인은 종교에 대한 관용이었다. 그리스 문화를 계승한 로마는 다신교를 믿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은 인간에게 군림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노력하게 허용했다. 유일신을 신봉했던 유대교나 거기에서 파생된 기독교가 초기에 로마와 충돌했던 것은 신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로마인이 믿었던 신은 30만이 넘었다.

건국의 아버지 로물루스, 카이자르, 아우구스투스는 물론 자기들이 정복한 민족의 신도 받아들였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것처럼 그들이 믿는 신도 로마의 신으로 받아들였던 배경에는 로마인들의 현실적인 감각과 관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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