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꽃 피다

이인숙

베란다 구석에서
지난가을 신문지로 꼭 싸둔 배추 한 포기
어둠을 밀어내고 노란 꽃을 피웠다
구석을 잠시 방치한 사이
햇살이 창문을 넘어와
봄을 부추겼나 보다
홀로 순산한 미혼모의 낯빛 같은 꽃잎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꽃을 피울 때마다
쏟아냈을 산고의 색채
겹겹이 두른 푸른 치마를 버린 몸이
처음이자 마지막 같다 다짐 같다
속살까지 다 내주며 붙잡고 있는 꽃대궁
비쩍 마른 어미젖을 물고 있는 배추꽃
겨울의 문을 열고
직립의 공간으로 빠져나온다.

 

 

[시평]

생명은 참으로 강인하다. 베란다 구석에서, 지난 가을 신문지로 싸둔 배추 한 포기가 암울한 겨울을 잘도 견뎌내고, 어둠을 밀어내고 노란 꽃을 피웠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저 버린 듯 팽개쳐 둔 배추가 자신을 둘러싼 추위를 밀어내고, 이제 봄이 왔다고, 만물이 다시 살아나는 봄이 왔다고, 노란 꽃을 피웠다나, 참으로 생명이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만물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그 환경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감내해내며 살아야만 하는 만물, 그 생명들. 참으로 생명이란 그런 면에서 대단하고 또 고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음을 스스로 감지하고, 그 계절에 맞는 모양으로 변해가는 생명의 그 모습.

그 순리에 순응하고 대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인내하고 아파해야 하는가. 그리하여, 자신의 속살까지 다 내주며 힘들게 붙잡고 있는 생명의 꽃대궁. 어린 아이에 비쩍 마른 젖을 물린 어미와도 같이, 자신의 속 모두 비워내면서 돋아 오르는 배추꽃, 어둡고 긴 겨울의 문 스스로 열고, 그 고귀한 생명의 꽃 오롯이 피워 올린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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