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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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대선을 10개월여 앞두고 여권에서 다시 개헌론이 제기되고 있다. 평소 개헌의 당위성을 강조하던 박병석 국회의장이 앞장서는 모양새다. 평소 ‘의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던 박 의장의 취지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이른바 ‘87년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현행 헌법은 바뀌어도 벌써 바뀌어야 했다. 그동안 시대가 바뀌어도 엄청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대통령 중심제’의 폐해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한국정치를 이런 식으로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개헌 없이는 그 어떤 변화도 성공하기 어렵게 돼 있다. 이런 점에서도 박 의장의 문제제기는 옳다. 박 의장은 지난해 6월 취임 이후 권력분산과 국민통합을 위해 반드시 개헌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개헌논의는 그 자체가 고도의 정치행위다. 그 과정은 한국사회의 총체적 문제가 한꺼번에 집결되는 거대한 ‘공론의 장’이며 동시에 각 정파 및 사회 각 부문의 이해관계가 한꺼번에 충돌하는 ‘투쟁의 장’이다. 따라서 정치권 합의가 어려울뿐더러 특히 크고 작은 정치일정과 맞물리면서 개헌의 당위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것도 결코 간단치 않다. 물론 여론도 그다지 우호적이라 할 수 없다. 그동안 개헌론과 관련해 변죽만 울렸을 뿐 제대로 된 논의조차 하지 못한 배경이다.

지금 아니면 또 다음 정권으로 넘겨야 한다는 부담과 국회의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컸던 것일까. 마침 박병석 의장이 나섰다. 지난 21일 국회의장 직속의 국회 국민통합위원회가 ‘국민통합을 위한 정치제도 개선’이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가졌다. 여야 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개헌과 선거제도 등의 개혁방안을 논의했다. 개헌문제를 공론장에 올린 일종의 마중물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의견을 모으기엔 역부족이었다. 문재인 정부 임기 초에도 개헌문제가 큰 이슈가 돼서 ‘초안’까지 만들어졌지만 정치권 합의엔 이르질 못했다. 정략의 의도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 후엔 모두가 손을 놓다 보니 이제는 각 정당마다, 각 정파마다 개헌 셈법이 제각각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변죽만 울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권력구조 혁신은 개헌의 필요성 가운데 으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국민통합은커녕 대통령 임기 내내 ‘무한 정쟁’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명백하다. 민생은 벼랑 끝으로 몰리고 정치권은 ‘편 가르기’ 싸움질로 날밤을 샌다. 언론도, 여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임기 말쯤엔 어김없이 대통령 권력의 ‘레임덕’이다. 문재인 정부는 좀 다를지 모르지만, 제왕적 대통령의 임기 말은 늘 불행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래선 온전한 국정운영이 이뤄질 수가 없다.

현행 헌법의 대통령 중심제는 기득권을 쥔 정치세력들의 ‘꽃놀이패’에 다름 아니다. 여당이 죽어야 야당이 사는 방식이라면 그건 ‘정치’가 아니다. ‘전쟁’에 다름 아니다. 이를테면 문재인 정부가 망하니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선되고, 또 오세훈 시장이 망해야 다음엔 민주당 후보가 유리할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그들만의 권력게임이다. 국민은 말 그대로의 ‘졸(卒)’이 돼 버렸다. 헌법의 ‘대통령 중심제’가 그렇게 구조화 시켜버렸다. 개헌론의 절박한 당위성은 이것부터 바꾸자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에서 나오는 얘기는 상식 밖이다. 현행 청와대 중심의 대통령제를 장관과 정당이 중심이 되는 대통령제로 바꾸자고 한다. 심지어 국무총리 외에 각 정당에 기반을 둔 부총리를 대여섯 명씩 둬서 일정한 권력을 나눠 갖자는 것이다. 이런 발상이야말로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그들만의 탁상공론이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대통령 중심제는 어떻게 포장을 하든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장관과 정당은 그 하위 단위일 뿐이다. 그리고 만약 힘 있는 부총리가 대여섯 명이나 된다면 이번엔 정부가 부총리들 간의 싸움판으로 또 날밤을 샐 것이다. 국정운영 자체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민주당이 갑자기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어쩌면 지금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국면전환용’으로 개헌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개헌에 대한 시대적 통찰은커녕 당리당략의 셈법이 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실성도 없다. 민주당이 이런 식으로 개헌에 접근하는 것이 낯설지는 않지만, 이번에도 조변석개식의 주장을 내놓는 것은 심히 유감스럽다. 내용도, 공감도 심지어 진정성도 없어 보인다. 4.7재보선 참패 이후 이젠 내년 대선까지도 위태롭게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것이라면 불쾌함을 넘어 분노할 일이다. 제7공화국을 열어야 할 개헌론의 그 엄중한 시대적 책무를 이런 식으로 저급하게 접근하고, 심지어 핵심 내용마저 당리당략에 매몰된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다.

민주당이 정말로 지금 개헌을 할 의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 아니면 최근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국면전환용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대선의 ‘판 흔들기’인가. 참으로 무책임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지난 21일의 토론회에서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의 발언이 더 날카롭다. 장 의원은 “대선 레이스가 사실상 시작된 이 시점에서 개헌 논의가 촉발되는 것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 여권의 정치적 의도로 읽힐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김형오 전 국회의장도 “나도 개헌론자지만 정권 말기의 개헌 논의는 적절치 않다”고 가세했다. 민주당도 야권의 이런 비판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대부분의 국민도 장 의원과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 임기 막판에 개헌을 거론하고, 심지어 그 내용마저 당리당략용으로 의심된다면 더는 말할 필요가 없다. 차기 대선 전에 개헌을 하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갔다. 따라서 제7공화국을 향한 개헌의 절박성을 더는 욕되게 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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