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김성규 기자] 대미산성 석축은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석축 방식을 보이고 있다. ⓒ천지일보 2021.4.19
[천지일보=김성규 기자] 대미산성 석축은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석축 방식을 보이고 있다. ⓒ천지일보 2021.4.19

 

정연한 고구려석축 방식, 적색기와 많이 산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 고문 수차례 조사

남쪽 성벽 장관, 한눈에 봐도 고구려식 석축

홍천군, 대미산성 발굴조사에 큰 관심 가져

[천지일보=백은영․김성규 홍천주재 기자)]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시가지 동편에 위치한 남산 오룡산에 구축된 속칭 대미산성이 주목되는 고구려 산성 유적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홍천군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구려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이라고 되어 있으며 오룡산 자락에 석성의 유구가 구축돼 있다. 또 이와 연결된 삼국시대 추정의 판축 토성이 장성 형태로 중앙고속도로를 건너 홍천읍 장전평리 봉화산 남쪽까지 연결돼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5년간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을 계속 조사해온 이재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고문(전 충청북도문화재 위원)이 월간 글마루 4월호 특집 글에서 밝히고 있다. 이재준 고문은 그 근거로 속칭 대미산성은 여지도서에 나오는 벌력천(지금의 덕치천)을 장악하고 있으며, 석축은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석축 방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성 안과 석축 아래에서 전형적인 고구려 적색 와편이 다수 수습되고 있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고문(전 충청북도문화재 위원)) ⓒ천지일보 2021.4.19
성 안과 석축 아래에서 전형적인 고구려 적색 와편이 다수 수습되고 있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문화연구회 고문(전 충청북도문화재 위원)) ⓒ천지일보 2021.4.19

이 고문은 “성 안과 석축 아래에서 전형적인 고구려 적색 와편이 다수 수습되고 있으며 신라,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의 와편과 토기편이 산란하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이 고문은 지난 14일 홍천역사문화연구회 이병기 회장과 남산에서 남산 산림욕장에 이르는 산 능선을 조사, 능선을 따라 구축된 장성 형태의 토루를 확인했다.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것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서편을 삭토해 고준하게 만든 이 토루는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지역의 고구려 성 가운데 가장 크고 잘 남아 있는 포곡식 형태라는 것이다. 이 고문은 특히 산 능선 중간에 고준하게 쌓은 망대지 밑 구덩이에서 고구려 적색 와편 조각과 고려 조선시대 와편 더미를 발견했다.

이 고문은 이 유적이 망대지(望臺址)로 추정되며 밑바닥에서 적색의 기와가 찾아지는 것은 이미 삼국시대에도 이용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라가 고구려 성을 점령한 후 세운 별력천정(伐力川停)의 위치에 관해서는 더 많은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천지일보=이태교 기자] 대미산성 망대지 아래서 발견된 토기편들 ⓒ천지일보 2021.4.19
[천지일보=이태교 기자] 대미산성 망대지 아래서 발견된 토기편들 ⓒ천지일보 2021.4.19

다음 글은 글마루 4월호 이재준 고문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편집자 주).

홍천의 고구려 때 지명은 벌력천현(伐力川縣)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본래 고구려의 벌력천현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녹효현(綠驍縣)으로 고쳐 삭주의 영현으로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벌(伐)은 덕(德) 혹은 대(大)의 의미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고문에는 ‘벌(伐)’을 정복지 혹은 토벌한 지역으로 썼다,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돈발성(敦拔城)’을 홍천 ‘벌력천’으로 비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벌(伐)’을 ‘발(拔)’로 해석한 것이다.

대동여지도에는 벌력천이 표기돼 있는데 홍천의 지천으로 나온다. 지금의 수타사 가는 도로 옆을 흐르는 덕치천을 지칭한 것이다. 덕치천이 에워싸듯 흐르는 하류에 나지막한 오성산이 자리 잡고 있다. 오성산은 백제의 성지였으나 고구려가 빼앗아 벌력천현의 치소로 삼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천지일보=이태교 기자] 대미산성 토루 모습 ⓒ천지일보 2021.4.19
[천지일보=이태교 기자] 대미산성 토루 모습 ⓒ천지일보 2021.4.19

대미산성은 신증 동국여지승람 권40 홍천 편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術) 별집 권17, 관동지,홍천현읍지 등에 기록돼 있다.

여지승람에는 “대미산성 석축 주 이천일백 구십칠척 고칠척 금반퇴락(大彌山城 石築 主 二千一百 九十七尺 高七尺 今半頹落)”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대미’는 불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으나 실은 ‘큰뫼’ ‘대미’ 즉 큰 성을 지칭한 표현이다.

이런 방식의 능선을 이용한 판축성 구성은 고대 성의 일반적 형태다. 남한지역 임진강 남한강 유역에 있는 여러 고구려식 성 배치와 비슷하다.

대표적인 것이 양구 비봉산 성지다. 백제 초축으로 보이는 비봉산성도 대미산성과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산정의 테메식 석축성을 연결하는 동서 장축의 능선이 포곡(包谷)을 이루는 것이다.

신라는 벌력천현에서 고구려 군사들을 내쫓고 대규모 군사들을 주둔시켰다. 바로 10정의 하나를 이곳에 주둔시켰던 것이다.

벌력천정은 신라십정(十停)의 하나였다. 삼국사기에는 10정이 544(진흥왕 5)년에 설치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실제로 훨씬 늦은 시기인 677∼687년경에 걸쳐 9주5소경(九州五小京)이라는 지방 제도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통일전쟁 당시 대 백제, 고구려 전(戰)에서 활약했던 전직 화랑도들로 구성된 것으로 상정된다. 화랑도를 미륵의 화신으로 여겨 ‘큰 미륵’ 즉 ‘대미(大彌)’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천지일보=김성규 기자] 석축은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석축 방식을 보이고 있다. ⓒ천지일보 2021.4.19
[천지일보=김성규 기자] 석축은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석축 방식을 보이고 있다. ⓒ천지일보 2021.4.19

두 번째 답사는 남산 산행의 들머리인 ‘여우고개’에서 올라갔다. 성으로 오르는 길이 험난하다. 등산객들의 편의를 위한 시설이 없어 임시 가설해 놓은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했다. 밧줄을 놓치거나 발을 헛디디면 대형사고가 날 만한 절벽 같은 장애물을 두 번 이상 넘어 겨우 본성을 밟을 수 있었다.

벌력천인 덕치천과 오성산이 그림처럼 발아래 보인다.

정산에 오르니 고대 축성방식인 판축과 치성(雉城)의 유구가 확연하다. 답사반은 우선 성벽 주위에 산란한 기와편부터 수습했다. 처음 찾아진 것이 회백색의 신라기와였다. 그리고 백제 토기와 적색의 와편이 수습됐다.

남쪽 성벽에서 확인된 석축은 일부 무너졌으나 장관이었다. 토사로 매몰된 부분을 제거하면 더 많은 부분이 확인될 것 같다. 한눈에 봐도 고구려식 석축이었다.

이곳에 산재한 편마암을 벽돌처럼 장방향 형식으로 다듬어 들여쌓기로 쌓은 것이다. 무너진 석벽 안을 보면 대소 작은 돌을 넣어 석벽이 무너지지 않게 한 역학 구조가 잘 나타나고 있다. 성벽 아래서는 고구려 적색 와편들이 수습된다.

 

[천지일보=이태교 기자] 대미산성 정상에서 내려다 본 모습 ⓒ천지일보 2021.4.19
[천지일보=이태교 기자] 대미산성 정상에서 내려다 본 모습 ⓒ천지일보 2021.4.19

홍천군은 이 성의 발굴조사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허필홍 군수가 직접 산성에 올라가 우물터 등 유구를 둘러보고 정비를 지시했다.

2021년은 우물터와 성안길(內環道)을 재현하고, 망대터, 성문터, 훈련장, 숙영지 등에 이정표를 배치하는 작업에 착수하며 역사 유적에 대한 발굴은 전문기관에 의뢰, 고증을 받는다는 계획이다.

* 대미산성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 글마루 4월호 특집에 전재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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