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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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진시황, 한무제, 강희제와 더불어 중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황제이다. 그의 가장 뛰어났던 점은 용인술이었다. 특히 그는 신하들과 치도에 관한 기탄없는 토론으로 여론을 수집하고 그것을 국정에 반영했다. 직간의 대가는 위징이었다. 그는 수말에 반란을 주도했던 이밀(李密)의 부하였다가 당에 투항해 이세민의 형 이건성(李建成)을 섬겼다. 후계자 자리를 두고 골육상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제거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현무문에서 형을 죽인 이세민은 그를 크게 중용했다. 위징은 이세민이 잘못을 할 때마다 곧바로 직언을 했다. 이세민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형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 이세민은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큰일을 계획했다. 그때마다 위징은 이세민의 방종을 막으려고 했다. 어지간한 이세민도 내궁으로 들어와 이놈의 영감을 죽이고 말겠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이세민의 아내 장손황후는 예복을 입고 나왔다. 이세민이 의아해하며 까닭을 묻자 장손황후는 위징이 직간한 것으로 미루어 폐하께서 성군이 되신 것 같으니 축하드린다고 대답했다. 이세민은 부끄러워 노기를 풀었다.

이세민은 위징을 두려워했다. 무인이었던 이세민은 황제가 된 후에도 매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위징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반대했다. 어느 날 좋은 매 한 마리를 구한 태종은 그것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즐거워했다. 마침 위징이 대전으로 들어왔다. 놀란 이세민을 매를 품속에 감추었다. 위징은 일부러 장시간 국정현안을 보고했다. 위징이 나간 후에 재빨리 매를 꺼내보니 이미 죽고 말았다.

그가 죽자 이세민은 크게 슬퍼하며 ‘동으로 만든 거울은 의관을 바로 할 수가 있고, 옛사람이 남긴 기록은 천하의 성쇠를 알 수가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분명히 깨달을 수가 있다. 나는 항상 이러한 거울 3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위징이 죽었으니 거울 하나가 깨지고 말았다’고 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해 수나라가 당한 치욕을 갚겠다고 하자 위징은 극구 반대했다. 위징이 죽은 후에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실패한 이세민은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자신이 이러한 처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위징은 친척에게 특별한 혜택을 줬다고 고발당했다. 조사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이세민은 사과했다. 위징은 정중하게 절을 한 다음 말했다. “신은 충신(忠臣)이라는 명예보다 양신(良臣)되고 싶습니다.” “충신과 양신이 어떻게 다른가?” “양신은 옛날에 성군 순(舜)을 보필했던 직(稷), 설(契), 고요(皐陶)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충신은 포악한 하의 걸(桀)왕을 섬겼던 용봉, 은의 주(紂)왕을 섬겼던 비간(比干)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양신은 후세에 자신이 보필했던 군주를 성군으로 만들었다고 추앙받지만, 충신은 자신은 물론 일가족까지 몰살당하고 군주는 폭군이라는 오명을 듣게 만듭니다.”

이세민과 위징의 토론은 천하를 경영하는 군주와 그를 보필하는 신하 사이의 믿음에 대한 논의의 좋은 사례이다. 군주와 신하는 표면적으로는 충성과 복종 또는 보필관계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천하를 함께 경영하는 동업자이기도 하다. 이들의 경쟁에서는 군주가 신하보다 불리할 때도 있다. 위징이 이세민에게 당신은 군주로서 성군이 되느냐 아니면 폭군이 되느냐 양자택일밖에 할 수가 없지만, 자신은 신하로서 정도를 지키며 신념에 충실하다면 양신이 될 수도 있고 충신이 될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불리할 이유가 없다고 한 것은 일종의 협박이다. 위징은 나름대로 역사를 통찰하고 있었다.

그는 이세민이 성군이라는 명예를 얻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군주의 약점을 정확히 꿰뚫었던 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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