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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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재보선 압승의 기쁨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국민의힘이 다시 ‘자중지란’으로 빠지고 있다. 그냥 단순한 과도기적 상황이면 그나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정당은 언제나 시끄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지금 과도기적 상황이 아니라 고질적인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사실 지난 21대 총선 참패 직후 국민의힘은 당 혁신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김종인 비대위 체제를 택했을 뿐이다. 떠나야 할 사람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이심전심으로 잠시 호흡을 고르기 위해 ‘절충점’을 찾았던 셈이다.

김종인 비대위 체제는 지난 10개월 동안 당의 변화를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비록 그 성과가 크다고는 볼 수 없지만, 구태 인물들이 당 전면에 나서지 못하게 한 것만으로도 김종인 위원장의 역할은 컸다. 김 위원장 스스로 성찰하는 행동을 보였으며, 당의 정책 기조도 한 걸음 더 진화시켰다. 게다가 지난 4.7 재보선에서 국민의힘 압승을 견인해 냈다. 쉽게 이룰 수 없는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길었던 비대위 체제를 끝내고 김종인 위원장이 당초 약속대로 당을 떠났다. 4.7 재보선은 국민의힘이 뭔가를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는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4.7재보선 승리가 아니라, 지난 21대 총선 참패의 기억으로 당을 전면 혁신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너무도 적절한 지적이다. 국민의힘이 아직도 4.7 재보선 승리에 고무돼 있다면 그건 착각이 아니라 무능한 것이다. 여론이 금세 뒤바뀔 수 있음을 확인하고서도 민심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당의 존망을 걸어야 할 건곤일척의 승부 앞에서 또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김종인 이후의 국민의힘이 다시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국민의힘 새 당 대표 선출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비대위 체제 10개월을 거치고 나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더욱이 당을 떠난 김종인 전 위원장을 향해 내뱉는 어투는 험하다 못해 독기가 서려 보인다. 긴 시간 참고 참았던 구태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내밀고 나와 마치 자신들의 세상이 된 듯이 독설은 거침이 없다. 김종인 전 위원장을 두둔하는 얘기가 아니다. 최소한 김 전 위원장의 지적이 옳다면, 아니 고민이라도 해 볼 가치가 있다면 비난이 아니라 ‘경청’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한다.

김종인 전 위원장은 이런 국민의힘을 향해 ‘아사리판’이라고 불렀다. 그런 아사리판엔 이젠 관심도 없다며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아사리(阿闍梨)’는 본디 불가에서 ‘아주 훌륭한 스승’을 의미한다. 그런 훌륭한 스승들이 여럿이 모여 갑론을박하는 모습이 혼선과 갈등의 장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따라서 아사리들이 모여 논쟁을 벌이는 장소, 즉 ‘아사리판’은 긍정의 모습보다 부정으로 각인된 것이다. 김 위원장이 지금의 국민의힘 모습을 이런 아사리판으로 비유한 것은 더 이상의 기대나 관심도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국민의힘은 지금 세 가지의 과제부터 풀어야 한다. 첫째, 새로운 당 지도부는 구태와 그 아류의 인물들이 빠져야 한다. 20대 총선을 망친 인사들이 그 중심이다. 스스로 물러나 당의 변화와 혁신에 기여해야 한다. 4.7재보선의 기쁨을 안겨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둘째, 다른 당과의 통합 문제는 후순위다. 아직도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 채 또 이런저런 통합 얘기부터 쏟아낸다면 비대위 10개월의 와신상담이 허무하다. 축배를 들자마자 ‘자리 나눠먹기’의 구태를 국민에게 보여 줄 것인가.

진정 국민의힘은 스스로 아무 것도 보여 줄게 없는 정당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더는 할 말이 없는 대목이다. 셋째, 당의 존망을 걸고 ‘TK(대구․경북)’의 영토를 넘어서야 한다. 차기 대선까지 채 일 년도 남지 않았다. ‘지역정당’으로 포위된 제1야당이 차기 대선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자문해 봐야 한다. 마침 서울․부산시장도 배출했다. 그리고 과반을 차지하는 58명의 초선의원들도 있다. 게다가 여론이 꽤 좋은 유력 인사들도 적지 않다. 그들 중심으로 당의 새로운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 민주당과도 정확하게 대비되는 변화와 혁신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당권 도전에 나섰다가 물러선 5선 서병수 의원의 말이 상당한 호소력을 갖고 있다. 서 의원은 ‘패거리 정치’를 자양분으로 얻은 힘과 조직으로 국민의힘 대표가 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면서 “당 안팎에서 힘깨나 쓴다는 분들부터 지금은 나서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상보다 통찰력 있는 호소로 들린다. 국민의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를 맡고 있는 지상욱 원장의 지적도 날카롭다. 지 원장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전에 국민들로부터 심판을 받은 구태를 다시 우리가 보이는 순간 우리는 다시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혁신의 끈을 놓치는 순간 초선이든 중진이든 우리는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며 당의 전면적 변화와 혁신을 촉구했다.

국민의힘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구태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런 구태들을 제어할 수 있는 당내 중심축이 약하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철만 되면 찾아오는 모기떼처럼 당을 끊임없이 고통과 위기로 몰아넣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딱 지금이 그런 ‘위기의 시간’이다. 반면에 좀 더 세련되고 품격 있게, 그리고 좀 더 새롭고 미래지향적으로 당을 혁신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핵심은 ‘인적 청산’이다. 마침 그들의 대척점에 있는 민주당이 헤매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레임덕’ 직전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제 국민의힘이 화답해야 한다. 어떻게 바꿀 것인가. 대대적인 ‘정풍운동’도 좋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밟히기 마련이다. 이를 통해 새싹이 돋게 해야 한다. 그러나 끝까지 아사리판이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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