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균우 왕인문학회 회장 소설가
1학년 1반을 담임하게 되었을 때 이야기다. 그때는 학년주임 제도는 없었고, 학생주임을 맡아 일을 하면서도 형편상 임시로 겸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반 학생 중에 서희연이란 학생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바로 위로 농고에 재학 중인 오빠와 국민학교에 재학 중인 여동생 하나와 함께 시내에서 어렵게 사글세방에 살고 있었다.

입학을 하고 며칠이 지난 후 반장선거가 있었는데 희연이가 반장에 당선되었다.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 가운데 과반수가 훨씬 넘는 같은 국민학교 출신들이 몰표를 주어 당선되었던 것 같다. 가정은 어려워도 그만큼 학생들의 호감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시내에 나갔다가 길에서 희연이의 어머님을 만났다. 처음 만났지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유산도 전혀 없는 데다가 아이들은 많이 딸리고 죽지 못해서 안 해 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남의 집 식모며, 노동판 노동이며, 군부대 식당 종업원이며, 먹고 살기 위해 별의별 일도 마다 않고 다 해보았단다. 밥을 굶기가 예사였고 심지어 희연이는 영양실조로 실명의 위기까지 이른 적이 있었다고 했다. 참으로 가련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학교에 나온 나는 그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눈이 정상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불행한 모습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순진하고 깨끗하고 단정한 티 없이 맑은 예쁜 여학생이었다. 분명히 도와주어야 할 학생인데 방법이 없다. 그런데 마침 ○○새마을금고에서 개업 기념 장학금을 준다고 하기에 적극 교섭하여 희연이의 2기분 납부금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었다. 또 교사로서 출장의 기회가 적었지만 출장을 가면 쓰고 남는 돈은 쓰지 않고 저축을 했다.

원로교사였던 곽기한 선생님이 위암으로 오랫동안 출근을 못하고 몸져누워 서너 달을 결근하고 있었을 때였다.

학교대표로 문병을 가라고 해 출장 명령을 받고 다음 날 일요일 대전으로 가려는데 전날 저녁에 부음을 받고 여러 사람이 문상을 같이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자비로 가고 나만 출장비를 받아서 미안한 생각도 들어 그것도 저금을 했다. 학생지도 때문에 관내 출장도 가끔 있었지만 식사가 해결되는 경우 출장비를 아껴서 저금을 했다.

또 항상 해왔던 일이지만 빈 병과 폐휴지를 모아(그때는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폐휴지 모으기를 하지 않았었다) 판 돈을 모아온 것이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당시로서는 꽤 많은 4만 3750원이나 되었다.

교장, 교감이나 다른 교사들이 알 리도 없고 내가 남 모르게 모아 저축한 것이니 내 마음대로 써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경위를 자세히 말씀드리고 우리 반 학생인 서지연(1학년 1반)과, 고인정(1학년 3반), 정문례(2학년 9반), 최진실(3학년 5반), 조은숙(3학년 6반), 유정숙(2학년 6반)등 여섯 명을 선정해 장학금으로 7000원씩 지급했다.

물론 선발은 담임들이 했지만 내가 제시한 기준에 의해서였고 기준은 공부보다도 심성이 착한 가난한 학생들을 선발하도록 했다.

또 해가 바뀌어 새 학년이 되었다. 얼마 있다가 학생회 정부회장 선거가 있었다. 그때는 담임은 하지 않고 학생주임만 하고 있었다. 이제 2학년이 된 서희연에게 2학년 학생 부회장에 입후보를 하라고 권고를 했다. 입후보를 하였고, 또 당선이 되어 열심히 활동했다.

그때 마침 또 도비 장학생 추천의뢰가 왔기에 적극 나서서 추천하여 또 혜택을 받도록 했다.

다음 해는 5년 만기가 되어서 대안중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역시 그동안 모아온 돈이 7만 5000원이나 되었다. 그 돈을 김장규 교장선생님 입회 하에 위의 서희연, 그리고 김정숙에게 2만 5000원씩을 나누어 지급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를 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은 내 명의의 통장을 해약하고 김장규 교장의 명의로 바꾼 다음 인계하면서 다음에 어려운 학생이 나오면 장학금으로 써 주길 부탁하고 학교를 떠나왔다. 그 후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지만 유익하게 잘 사용했으리라 믿는다.

김정숙은 부모가 이혼해 갈라 섰는데 아버지는 재혼해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고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3남매를 데리고 나와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어렵게 사는 처지였다. 이 학생은 ○산여고 졸업 후 내 소개로 서울 남창의원 직원으로 취업시켰고 우리의 동료인 김상춘 교사와 나의 중매로 결혼을 해 슬하에 남매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서희연도 충남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잘살고 있다.

그 당시 나는 학생주임으로 열심히 일했고 학생주임이란 학생들의 비행을 예방하고 엄하게 다스리는 직책이니 학생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으나 여학생들은 장난삼아 가끔 인기투표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매번 내가 1위였으니 즐거운 일이었고 역시 그리운 추억이 아닌가 싶다.(1984)

다른 학교로 전근 간 후 ○산 여중고에 볼일이 있어서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 학생이 유리창 밖을 내다보다가 나를 보고 “선생님!”하고 소리치니까 그 소릴 듣고 웬일인가하고 학생들은 창문을 열어보게 됐고 나를 본 학생들은 사방에서 창문을 열고 환호를 하면서 환영해 주는 대단히 기뻤던 일이 있었다.

교사생활의 보람을 또 한번 느꼈다. 요즘 학생들도 사제 간 이렇게 끈끈한 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로 그리운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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