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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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8년 만에 지난 23~25일 방한했다. 주요일정은 ‘한러 상호교류의 해’ 개막식 참석과 외교장관 회담이었다. 그런데 라브로프 장관이 중국을 들러서 방한했고 그 시점이 공교롭게도 한미 외교장관의 서울회담과 미중 고위외교당국자의 알라스카 회담 직후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국내 언론은 한러 양자관계 보다는 주로 미중 ‘신냉전’으로 인한 진영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보도했다. 한러 수교 3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한러 협력에 대해 관심을 제고할 수 있는 기회를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 안타깝다.

2018년 6월 한러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수교 30주년이 되는 2020년을 ‘한러 상호교류의 해’로 선포하고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한러 양측은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양국 수도와 주요 지방도시에서 다양한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행사가 연기되면서 작년 6월 양측은 기념행사 추진기한을 2021년까지로 연장했다. 이에 따라 당초 2020년 3월로 예정됐던 러시아 외교장관이 참석하는 기념행사 개막식이 이번에 개최된 것이다.

이번 외교장관 회담에서 양측은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양자 협력사업 현황을 점검했으며 코로나19 상황이 안정되는 대로 푸틴 대통령의 방한이 조기 실현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한러 협력은 현재 러시아의 신동방정책과 우리의 신북방정책의 접점인 ‘9-브릿지(Bridge)’ 사업을 핵심 축으로 하고 있다. 양국은 소재, 부품 및 장비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10억불 규모 공동투자펀드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서비스·투자 분야 FTA 협상이 진행 중이며, 러시아 북극 지역 경제 특구에서의 투자 협력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또한 중소제조업의 러시아 진출 발판이 될 연해주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조선분야에서는 최근 2년간 LNG 쇄빙선 5척 공동건조 및 LNG 환적설비 2척 수주 등 협력이 활발하다. 러시아의 기초/원천기술과 한국의 응용기술의 교류를 촉진하기 위한 혁신 플랫폼도 구축됐다. 끝으로 이번 회담에서 라브로프 장관은 K-방역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러시아가 개발한 백신 ‘스푸트니크 V’가 한국에서 위탁 생산돼 전 세계에 공급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내 언론은 수교 30주년 기념행사나 양자 협력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숨 가쁜 한반도 주변 외교전” “중러 연대 강화 속 북핵 논의 주목” “중국서 ‘반미공조’ 과시한 러 외무, 한국선 어떤 메시지?” “중·러 밀착 속 러시아 외무장관, ‘약한 고리’ 韓 공략할까” 등 기사 제목이 보여 주듯이 한러 양자 관계는 제쳐 놓고 미중 갈등과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 라브로프 장관의 방한은 미중 갈등 상황과는 무관하게 한러 양국의 우의를 증진하고 양자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미 정해진 일정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라브로프 장관은 청와대 예방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러시아 외교부 내 한반도 및 북핵 문제를 담당하는 마르굴로프 차관이 동행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번 방한은 수교 30주년 기념행사 개막식 참석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라브로프 장관은 중국에서 왕이 외교부장의 대미 강경발언에 장단을 맞춰 주었으나 서울에서는 이렇다 하게 미국에 대한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 없었다. 동북아 안보 문제에 관해 “모든 관련국이 군비경쟁과 모든 종류의 군사 활동의 강화를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역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관련국 간 협상 프로세스가 가능한 빨리 재개돼야 한다.”는 원론적 발언을 했을 뿐이다. 미국의 반중 연대 추진과 관련해 한국에 대한 견제로 해석될 만한 발언도 없었다. 하지만 국내 매체들이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국들의 외교전이라는 틀을 정해놓고 보도하다 보니 한러 양자관계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이 와중에… 러 외교장관과 회담하는 韓” “바이든, 반중 전선 강화하는데/中과 밀착하는 러시아와 만나” 등 어처구니없는 제목의 기사도 있었다. 국내 언론의 금번 라브로프 장관의 방한 보도를 보면서 우리 언론의 한러 협력에 대한 무관심, 러시아에 대한 이해 부족, 러중 관계의 실상에 대한 오해 등이 재확인돼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향후 우리 외교의 중차대한 시점에 상황 또는 정세 판단을 그르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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