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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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예상을 뒤엎고 일본은 러시아를 이기고 있었다. 5월 21일에 고종은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칙유(勅諭)했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 그런데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는 도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에 있을 뿐이다. 청렴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재산을 늘리고, 근면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생업에 힘쓰며, 공정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 없게 되고, 신의로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법령을 어기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아는 법이다. … 그러나 안으로는 각 부서의 신하들이 안일하게 지내면서 백성들을 구원하는 길로 나를 바로 이끌어 주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지방 관리들이 탐욕에 젖어 백성들을 잔학하게 대하여 백성들은 근심과 고통을 호소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종종 생계를 잃고 여위어서 어느 순간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질지 모르게 되었다. … 이에 짐이 먼저 반성하고 자책(自責)하면서 그에 기초하여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내용의 여덟 글자를 직접 써서 내려보내니, 경계하고 힘써라.”

이어서 고종은 ‘염근공신 이안사민(廉勤公信 以安斯民)’을 친필로 써서 중앙과 지방 관청에 보내고 현판으로 걸도록 했다(고종실록 1904년 5월 21일).

두 달 정도 지난 7월 15일에 중추원 의관(議官) 안종덕이 ‘조정이 청렴, 근면, 공정하지도 않고 신의도 없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5월 21일에 내린 칙서(勅書)를 삼가 보니, 빛나는 586자의 말은 간곡하기 그지없고 엄정하면서도 측은하게 여긴 것이었는데,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하며 신하들을 신칙(申飭)한 내용은 마치 해와 달처럼 밝고 쇠나 돌처럼 확고한 것이었습니다. … 대체로 청렴이라는 것은 의리와 예의의 틀이고, 근면이라는 것은 지식과 행동의 용기입니다. 공정이라는 것은 어진 이의 큰 덕이며, 신의라는 것은 덕을 세우는 기초입니다.… 만약 청렴·근면·공정·신의, 이 네 가지가 시행되면 역사에 기록된 훌륭한 황제가 다섯에서 여섯으로 늘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폐하가 임오년(1882) 이후부터 수십 년 동안 환난이 생길 때마다 밝은 조서를 내린 것이 몇천 마디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자신을 반성하고 아랫사람을 격려하며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 일하겠다고 다짐 안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관리들의 부패는 전(前)과 같아지고, 무사안일과 불공정도 전과 같아지고, 신의를 잃는 것도 전과 같았습니다. 이는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말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얕고, 마음으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은 깊다고 합니다.… 군자는 말을 할 때는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을 할 때에는 말을 돌아보니,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말을 안 하는 편이 더 나은 것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폐하께서는 말로 사람을 감동시키려 했지,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씩 진술하겠습니다(고종실록 1904년 7월 15일).”

안종덕은 고종의 ‘염근공신 이안사민(廉勤公信以安斯民)’ 칙유가 ‘진정성’이 없다고 상소한다. 고종의 반성(反省)과 자책(自責)도 ‘보여주기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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