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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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506년, 오초(吳楚)대전이 발발했다. 손무(孫武)는 국력을 총동원하는 새로운 전쟁개념을 수립하고, 비범한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초의 정황에 맞춰 오의 전력을 정비하는 한편, 실행 가능한 여러 가지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충분한 보급물자를 확보하고 수송계획을 수립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전국시대의 강국 초도 만만치는 않았다.

초도 충분한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초에는 오자서(伍子胥)의 원수 평왕(平王)이 죽고 그의 아들 소왕(昭王)이 등극했다. 초왕은 심윤술(沈尹戌)에게 오와 초의 전력을 분석하고,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비하도록 명했다. 심윤술은 낭와(囊瓦)를 한수(漢水) 남쪽에 파견해 오군의 기습에 대비하고, 자신은 오군의 후방을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손무는 이미 심윤술의 전술을 예측했다. 초군은 대패했다.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할 때 오왕은 손무의 공을 최고로 평가했다. 그러나 손무는 자기에게 주어진 상과 관직을 한사코 사양했다. 그는 사직을 요청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모두 그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려 후한 녹봉과 높은 관직을 받는 것은 조상을 빛낼 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길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일생을 걸고 분투노력하지만, 손무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다면 손무가 추구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왕에게 제출한 사직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초야에 묻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대왕의 후은을 입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오를 강성하게 만들고 주변국을 정벌해 업적을 쌓은 것은 신하된 자의 마땅한 의무였을 뿐입니다. 높은 관직과 후한 녹봉은 가당치 않습니다. 전공을 세우고 정치적 업적을 쌓은 것은 모두 대왕의 공덕입니다. 지금 신은 이미 나이가 많아서 앞으로 발생할 일을 제대로 처리할 여력이 없습니다. 신이 대왕의 곁에 남아 있으면 오의 대사를 그르칠 것입니다. 부디 전원으로 돌아가 깨끗하고 조용한 여생을 보내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왕 합려는 손무의 고귀한 인품을 존경하며, 손무가 자신을 떠나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재야에서 손무를 끌어냈던 오자서가 나서서 만류했지만 설득할 수 없었다. 손무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줬던 평생의 지기 오자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에게 주어진 명성과 관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제가 세상에 나온 것은 그대의 성의와 우정 때문이었고, 공업을 이룬 것은 행운이었을 뿐입니다. 그대의 우정에 대한 보답도 이것으로 다 했습니다. 저는 이미 늙고 쇠약해 앞으로 다가올 일을 처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대에 대한 우정은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일세의 영걸은 부귀영화에 흔들리지 않았다. 누구도 쉽게 흉내라도 낼 수 없는 결정이었다. 오랜 관직생활을 통해 그는 정치의 어두운 측면과 정치투쟁의 위험성을 여실히 깨달았다.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며, 잔인하고 악랄한 마음으로 상대를 몰아쳐야 했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던 고통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불후의 명작 손자병법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승리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오왕을 떠났던 진짜 이유는 역사가 증명한다. 오왕 합려는 춘추오패 가운데 4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강자가 되자 합려는 교만해졌다. 월에 대한 정책의 차이로 오자서와 마찰이 발생했다. 오자서는 그가 보낸 칼로 자결했다. 국력을 과시하다가 국제적으로 고립돼 결국은 월왕 구천(句踐)에게 대패했다. 전쟁의 패배는 비참했다. 강성했던 오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수많은 사례를 연구했던 손무라면 이러한 결과를 예측했을 것이다. 최고의 전쟁전문가가 전쟁을 가장 꺼린 아이러니를 눈여겨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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