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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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이제까지 북한에 대해 상식 밖의 저자세를 보인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지난 18일에 끝난 한미연합훈련을 전후해서 현 정부 및 여권에서 보여준 행태가 그러하다. 그들은 김정은이 자신들의 충정을 알아주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줬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까? 김정은이 1월 초 노동당 대회에서 한미연합훈련의 중단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1월 중순 신년기자회견에서 “한미군사훈련 문제와 관련해 필요하면 북한과 협의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서 외교부 장관과 통일부 장관이 향후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을 이유로 “적절한 수준” “유연한 해법” 등 표현을 써가며 훈련 축소 또는 연기론에 불을 지폈다. 2월 하순에는 더불어민주당 및 열린민주당 등 범여권 국회의원 35명이 훈련 연기를 촉구하고 나섰으며,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도 “한미훈련을 실행한다면 북한이 어떤 방식으로든 반발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연기 또는 취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세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3월 초 ‘다시 평화의 봄, 새로운 한반도의 길’ 토론회에서 한미연합훈련에 대해 “내 생각으로는 올해에는 안하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김 위원장이 분명히 중단할 것을 이야기했다”고 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김정은이 한 말을 모르고 있을까 걱정돼 하는 이야기 같았다.

올해 연합훈련은 3년째 대폭 축소된 형태로 야외 기동훈련 없이 컴퓨터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진행됐다. 통일부는 훈련이 시작된 날 이 점을 강조하며 “북한도 우리의 이러한 노력에 상응해서 유연한 태도를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심지어 통일부 장관은 “훈련의 연기도 생각했으나 전작권 환수를 위해 부득이 최소한으로 하였다”고 이유까지 밝히며 북한의 이해를 구했다. 김정은의 ‘하명’을 ‘관철’하지는 못했지만 ‘성의’를 다했다는 이야기인가? 북한은 연합훈련이 끝나기 하루 전인 17일 입장을 내놨는데 김여정은 막말을 쏟아내면서 연합훈련을 거칠게 비난하고 대남 대화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및 금강산 국제관광국을 비롯한 교류·협력 기구들의 폐지, 그리고 애초부터 북측이 지킨 적이 없는 남북군사합의서의 파기를 거론했다. 이에 대해 우리 측은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있다.

그간 김정은과 김여정의 발언에 대해 현 정부는 마치 그들의 지시를 이행하는 듯 행동하는 일이 이어져 왔다. 탈북민들이 날린 전단의 내용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자 즉시 ‘대북전단금지법’을 제정했으며,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규탄 결의에 지속적으로 미온적 태도를 보여 오면서 2016년에 공포된 ‘북한인권법’을 시행하기 위한 북한인권재단의 출범을 미루고 있다. 개성에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지은 남북연락사무소 건물을 폭파했을 때 여권에서는 ‘대포를 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서글픈 반응이 나왔다.

한미연합훈련은 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 1월 “핵 무력을 바탕으로 조국 통일을 앞당기겠다”고 했다. 북한 정권은 여전히 우리의 주적이다. 방어태세를 허물라는 적의 말을 듣고 이를 순순히 행동에 옮기는 나라가 세상에 있을까? 우리 스스로 무방비상태가 돼 북한의 위협에 굴복하자는 것인가? 우리 사회의 평화지상주의자들은 왜 북한에 대해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의 개발 및 실험을 중단하라고 촉구하지 않는가? 역사는 일방적인 유화정책의 결과가 어떤지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북한에 대한 이러한 유화정책은 한 마디로 북한을 어떻게 보느냐와 연결되는 것 같다. 우리는 북한 정권과 북한 주민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가능하면 지원을 제공하면서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그들의 변화를 유도하되 엄격한 상호주의를 적용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이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방책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부 사람들은 통일지상주의와 민족주의 입장에서 북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고 본다.

이들에게는 어떤 형태의 통일이든 상관없는가, 그리고 북한 문제를 민족이라는 잣대로만 생각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하는 것인가 질문하고 싶다. 남북한이 민족공동체를 지향하는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한지 올해로 30년이 된다. 우리는 그간 최대한 선의를 갖고 북한을 대해 왔다고 본다. 북한도 그렇게 행동했는가? 북한이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는 계속 선의만 고집해야 하나? 아무쪼록 우리 사회에 냉철한 성찰이 있기 바란다. 문재인 정부는 소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개를 위해 가급적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렇더라도 수십 년째 실시하고 있는 방어 훈련까지 북한의 눈치를 보는 것은 도를 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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