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천안=박주환 기자] 1일 충남 천안시 목천읍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서 열린 3.1절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자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천지일보 2019.3.1
충남 천안시 목천읍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참석자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천지일보BD

대한매일신보의 ‘베델 선생’

일본의 만행 알린 ‘스코필드’

항일의병의 산 증인 ‘맥켄지’

[천지일보=이우혁 기자]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온 땅에 울려 퍼진 자유와 평화의 외침은 어떻게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됐을까? 본지는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독립투사들과 함께 일제의 탄압을 세계에 알렸던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해봤다.

구한말부터 본격화된 일본의 침략은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신민과 이익을 보호한다’는 을사늑약의 명목하 정점에 달했다. 고종은 이를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이를 무력으로 체결했다. 결국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일본의 식민지배가 시작됐다.

식민지배로 인한 조선인에 대한 학대와 폭력이 자행됐고, 독립군 투사들은 1896년부터 ‘독립신문’ 등을 만들어 이를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일제가 이를 두고 볼 리 없었다. 갖은 이유를 만들어 신문사를 탄압했고, 인쇄소에 불을 질렀으며 기자들을 잡아갔다.

일제의 이러한 만행에도 오늘날의 우리가 그 역사를 알고 독립국가에 살 수 있는 것은 독립투사들과 함께 일제의 탄압을 세계에 알렸던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사 탄압에 직접 맞선 ‘대한매일신보’

대표적 항일 언론지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배설(한국명, Ernest Thomas Bethell: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1872~1909).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대표적 항일 언론지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배설(한국명, Ernest Thomas Bethell: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 1872~1909). (사진제공: (사)배설(베델)선생기념사업회)

“내가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원케 해 한민족을 구하라.”

1909년 5월 1일, 37살의 젊은 나이로 순국한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년)’ 선생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이 당시 모든 반일 관련 기사는 일제의 신문사 검열로 발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1904년 베델 선생은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해 이 같은 사실을 국내와 해외에 전했다. 영국인이었던 베델 선생은 대한제국에서 치외법권의 특혜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도 이를 두고 어쩔 수는 없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항일 일병활동’을 보도했다. 또 항일운동의 본진 역할을 했는데 1907년에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1907년 2월 대구에서 발단된 주권 수호 운동인 국채보상운동 등이 이곳에서 뿌리를 두었다.

일본은 눈엣가시였던 베델 선생을 ‘조선인을 선동한 죄’를 명목으로 영국 법원에 고발했다. 이로 인해 1907년 10월과 이듬해 6월 베델 선생은 법정에 섰다. 법원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항해 봉기하도록 선동한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다”며 “베델 선생이 계속 반란을 선동한다면 추방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한매일신보를 지켜야 했던 베델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 기자가 “베델 선생이 국체보상금을 횡령했다고 자백했다”며 허위보도를 냈다. 외신들은 해당 기사가 ‘일본인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밝혀냈고, 베델 선생은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델 선생은 이때의 일들로 인해 건강이 크게 악화됐고, “한민족을 구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독립운동가로서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3.1운동 알린 푸른 눈의 ‘조선인’

34번째 민족대표 프랭크 W. 스코필드 (제공: 스코필드 장학문화사업단)
34번째 민족대표 프랭크 W. 스코필드 (제공: 스코필드 장학문화사업단)

“국민은 불의에 항거해야만 하고 목숨을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광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년) 박사는 1919년 3월 1일 민족적인 만세운동에 협력을 요청받았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그가 조선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16년 11월 캐나다에서 건너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맡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선교사로서 조선 땅을 밟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가혹한 식민지배의 참상은 일제의 만행을 알려야겠다는 그의 결심에 불을 지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2월 28일 오후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에 보내달라는 다급한 요청에 응했고, 3월 1일 오후 ‘하얀 옷을 입은 민족들의 만세시위현장’을 사진기에 담았다. 또 4월 15일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서 우리 민족 30여명이 죽임당하는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보고를 남겼고, 이를 통해 같은 해 7월 26일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가 알게 됐다.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 후 5월 서대문 형무소를 직접 찾아가 유관순 여사 등을 만나 위로하고, 8월 29일 일본의 하라 수상을 찾아가 조선의 자치에 대해 강론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그는 ‘단단하다’ ‘무섭다’ ‘남을 돕는다’는 자신의 한글 이름 ‘석호필(石虎弼)’을 사랑했다. 아울러 편지로 “나는 캐나다인보다도 조선인 같다”고 고백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의 항일의병활동 알린 종군기자

의병부대 1908년, 양평. (출처: 독립기념관)
의병부대 1908년, 양평. (출처: 독립기념관)

프레더릭 맥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 1869~1931년)는 1920년 발간한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항일 의병들을 보고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매우 측은하게 보였다. 희망도 없는 전쟁에서 죽을 것이 확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몇몇 군인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가엾게만 생각했던 내 생각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들은 자기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서 접한 적이 있는 그 ‘의병 사진’은 1907년 맥켄지가 찍은 것이다. 또 그는 당시 나라를 잃은 슬픔을 딛고 일어선 의병장의 말을 우리에게 전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아무도 기억할 수 없는 고독한 싸움에서 맥켄지는 의병들의 발자취에 관심을 뒀고, 그가 의병 활동의 적극적으로 취재해준 덕분에 오늘날의 우리는 당시의 참혹한 실상과 슬픔을 사진으로 접할 수 있게 됐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던 동방의 작은 나라. 하지만 독립투사들만큼 나라를 사랑한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선조들이 전하는 한민족의 ‘자유와 정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맥켄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산 역사의 증인이 됐다.

“나는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한 고대 민족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비극적인 공포 속에서 살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한 몽고계 민족에 관해서 기록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의 필수 요소들 자유, 신앙, 여성의 명예, 그리고 그들 자신의 영혼과 같은 것들을 누린 적이 있으며 지금도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자유’와 ‘정의’를 외치고 있다. 세계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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