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이 추진하였던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베이징(北京) 망명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국권회복(國權回復)을 향한 고종황제의 항일의지(抗日意志)는 변함이 없었는데, 이러한 의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파리강화회의 파견이었다.

거슬러 올라가서 1907(융희 1)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특사가 고종황제의 밀명(密命)에 의하여 헤이그로 파견되어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호소하려다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준 특사는 현지에서 장렬하게 순국(殉國)하였으며, 결국 이 사건의 여파로 고종황제는 강제퇴위가 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덕수궁(德壽宮)에서 유폐(幽閉)가 된 상황에서도 국권을 회복하려는 그 의지는 변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1918년 파리강화회의 특사로 의친왕(義親王)과 웨슬리언 대학 동문인 김란사(金蘭史)를 함께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러한 중대한 거사를 앞두고 뜻밖에 붕어(崩御)를 하면서 그러한 계획이 중단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계획이 중단된 이후 결국 1918년 상해(上海)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김규식(金奎植)을 한국 대표로 파견하는 것을 추진하여 마침내 1919년 3월 13일 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수행하였으며, 일제침략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참여국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의친왕의 처소인 사동궁(寺洞宮)에는 일본경찰이 보초를 서면서 출입자를 감시했고, 궁내 사무실에서는 일본인 사무관이 유리창으로 감시하면서 의친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총독부(總督府)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삼엄한 감시를 받아가면서도 의친왕은 3.1운동 준비와 관련하여 손병희(孫秉熙)와 모의를 했던 사실이 1919년 11월 24일자 총독부 경무국장이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밝혀져 있다.

“공은 즐겨 시정잡배와 왕래하였는데, 금춘(今春) 독립운동의 수모(首謨)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하였고 손(孫)이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狼狽)한 빛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제의 공식적인 기록에 의친왕이 3.1운동의 배후에서 손병희와 비밀리에 회합하고 모의를 했었다는 것이 밝혀진 사실을 주목한다.

또한 사동궁의 위치가 3.1운동이 일어난 파고다공원 근처였고, 특히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태화관(泰和館)이 사동궁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인쇄하였던 보성사(普成社)도 사동궁 근처인 인사동 골목에 위치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의친왕이 3.1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의친왕이 3.1운동 당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손병희와의 깊은 친분 관계가 있었다는 점과 일제 측 문서에서 이를 입증할 만한 정황이 나온 것으로 볼 때 배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한편 3.1운동 이후 의친왕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분수령이 된 사건이 있었으니 이를 흔히 ‘의친왕망명미수사건(義親王亡命未遂事件)’이라 일컫고 있는데 본 사건을 추진한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으니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이하 大同團)이라 불리는 단체였는데, 대동단은 어떤 배경에 의하여 결성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경위를 소개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