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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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우리 사회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매일 접하는 언론 기사를 보면 폭력이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등장한다. 부모의 16개월 유아 학대 사망 사건, 유치원 아동 폭력 행위, 중고교생 집단폭력 사건 등이 끊이지 않는다. 폭력은 위험 수위를 넘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주 설 직전에는 스포츠계에서 학교 폭력 행위가 드러나며 국민적인 공분을 샀다. 여자배구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흥국생명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로부터 오래전 학교 폭력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주장이 인터넷에 폭로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 문제가 다시 재조명됐다. 자매와 같은 중학교(전주 근영중) 배구부 출신이라고 밝힌 피해자는 “10년 전 일이라 잊으려 했지만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모르고 사는 것 같다”며 21개 항에 걸친 피해사실을 폭로했다. 폭로한 내용에는 상습 폭행이나 욕설 외에도 칼로 협박하거나 금전을 상습적으로 갈취하는 등의 충격적인 내용이 담겼다.

자매는 곧 “철 없었던 지난날 저질렀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많은 분들에게 상처를 줬다”며 사죄를 했다. 소속팀인 흥국생명은 자매에 대해 무기한 출전정지 처분을 내리고, 대한민국 배구협회는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하는 중징계 처분을 결정했다.

하지만 둘의 문제는 또 다른 학교폭력 폭로로 번져 나갔다. 남자 프로배구 OK 금융그룹의 공격수 송명근과 심경섭이 중고교 시절 저지른 폭행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됐다. 두 선수는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올 시즌 잔여 경기를 출전하지 않기로 했다.

연속적으로 터진 학교폭력 문제를 보면서 지난 1992년 배구기자로 취재했던 효성여자배구단 집단 체벌사건이 떠올랐다. 1992년 1월 20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9회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 1차 대회에서 효성 소속 선수들이 모두 허벅지에 시퍼렇게 멍이 든 채 경기에 출전했다. 선수들은 이틀 전 열린 후지필름과의 경기에서 1-3으로 패한 뒤 숙소에서 코칭스태프로부터 단체 기합을 받고 폭행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 효성 선수들 가운데는 이번 폭력 사태에 가해자로 드러난 쌍둥이 자매의 어머니인 전 여자배구 국가대표 세터 김경희씨가 있었다. 당시 주장을 맡았던 김경희 씨가 당시 폭력의 피해자였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독일계 유태인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그의 대표적인 명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고발했다. 아렌트는 1961년 4월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된 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의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신문사 특파원 자격으로 취재한 결과, 사람들이 아이히만을 ‘괴물’이라 불렀지만 실제로 그는 평범함에도 미치지 못하고 어리숙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고 표현했다. 아이히만에게는 유대인을 학살해야겠다는 동기나 확신이 없었고 다만 상부에서 지시한 사항을 충실히 따랐다고 했는데, 이를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고 불렀다.

스포츠계에서 폭력이 끊이지 않는 것은 아렌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폭력에 대해 특별한 자각을 하지 않고 대물림하며 ‘평범한 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선배에게 당한 것을 그대로 다음 후배에게 되풀이하는 악습의 구조가 사라지지 않는 한 국내 스포츠에서 폭력을 추방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체육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스포츠에서 폭력을 없애기 위해선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적, 문화적 환경이 만들어지고 선수들이 서로를 인격체로 대우하며 도덕적, 윤리적인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끊임없는 자성의 노력과 깨우침이 없는 한 폭력의 고리는 좀처럼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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