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시대의 풍운아 의친왕의 발자취를 찾아서(7)
[문화칼럼] 시대의 풍운아 의친왕의 발자취를 찾아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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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1915년 의친왕(義親王)은 상해에서 이상설(李相卨),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조성환(曺成煥), 류동열(柳東說)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에서 고종황제(高宗皇帝)를 당수(黨首)로 추대하고 베이징(北京)으로 망명시키려고 할 때도 본 사건에 연루되었다.

관련해 당시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서울로 잠입한 외교부장 성낙형(成樂馨)을 비롯하여 의친왕의 장인 김사준(金思濬), 김사홍(金思洪), 김승현(金勝鉉), 변석붕(邊錫鵬), 김위원(金胃元), 심인택(沈仁澤), 박봉래(朴鳳來), 정일영(鄭馹永), 염덕신(廉德臣), 이경창(李慶昌) 등 관련자가 1915년 이후 전부 투옥되었는데, 본 사건이 바로 ‘보안법위반사건(保安法違反事件)’이었다.

이러한 ‘보안법위반’사건이 발생한 이듬해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大韓獨立義軍府 總司令)으로 활동하였던 임병찬(林炳瓚)이 별세(別世)하였으며, 의친왕이 추모제문(追慕祭文)을 보냈는데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의친왕이 임병찬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1907(융희 1)년 북한산성(北漢山城) 거사(擧事)를 신호탄으로 시작된 의친왕의 항일의지를 상징적으로 표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한혁명당 사건이 발생한 이후 1917년 의친왕의 항일운동과 관련이 있는 양기탁(梁起鐸)과 정안립(鄭安立)의 고려국(高麗國) 건립계획의 전모를 공개한다.

1917년 가을 중국 남방파 군벌인 주사형(朱士衡)이 북방파 군벌을 견제하기 위하여 만주의 독립을 선전하고 다녔는데, 실행방법으로 독군의 명의로 일본에서 무기를 차관하여 남방광뚱군(南方廣東軍)의 병력으로 일거에 만주독립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양기탁은 주사형의 계획이 만주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을 기반으로 한 독립국 건립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래서 정안립의 동삼성한족생계회(東三省韓族生計會)와 연계하여 맹보순(孟輔淳) 등과 함께 고려국 건립을 계획하였다. 1918년 8월 양기탁은 주사형과 함께 간도를 출발하여 지린(吉林), 테링(鐵嶺), 창춘(長春) 등을 경유하며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양기탁은 다시 상하이(上海)에서 주사형과 재회하기로 약속하고 12월 초 텐진(天津)에서 상하이(上海) 행을 준비하던 중 밀고에 의해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고려국 건립계획은 1918년 양기탁(梁起鐸)이 체포되고 주사형의 계획도 흐지부지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고려국 건립계획은 실패하였으나, 본래 양기탁과 정안립은 고려국 건립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고종황제(高宗皇帝)나 의친왕(義親王) 그리고 영친왕(英親王)의 망명(亡命)을 계획하였다.

1918년 텐진(天津)에는 이회영(李會榮)의 비밀조직이 활동하였기 때문에 양기탁과 이회영이 고종황제나 의친왕 그리고 영친왕의 망명계획을 상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김란사(金蘭史)가 베이징(北京)에서 독살되는 것도 베이징(北京)에 독립운동 비밀조직이 관여하였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베이징(北京)과 텐진(天津)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같은 독립운동 비밀조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양기탁과 손정도(孫貞道)가 1924년 동우회(同友會)에서 만나서 일하는 것도 같은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본다.

양기탁이 텐진(天津)에서 일경(日警)에 체포된 후에 정안립(鄭安立)이 고려국 건립을 주도하였는데 갑자기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붕어(崩御)하면서 망명 계획이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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