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와 입술

최정례(1955~2021)

 

비가 퍼붓고 있었다. 비가 수백만 개의 발을 내던지고 있었다. 생각 없이 퍼부어 대고 있었다. 신호등 앞인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 발짝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빗속에 수십 년간 갇힌 것 같았다. 신호등의 불빛이 날카롭게 산란하며 칼날을 그어댔다. 그 여름도 이런 장마 통이었다. 광포하게 퍼붓는 중이었다. 갑자기 그가 다리에 깁스를 하고 우산을 쓰고 깁스한 발에는 슬리퍼를 꿰어 신고 다른 한쪽에는 젖은 구두를 신고 왔다. “아니 그 발을 하고 이 빗속을 왜?” 우리는 서로의 표정을 살폈고 서로 젖은 얼굴과 산발한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그 무렵 우리의 말은 늘 적절하지 않았다. 서로를 찢는 어리석은 말들을 내던지고 후회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헤어졌다. 기억나는 것은 우산을 쥐고 있는 그의 손등이 내 입술 가까이에 있었던 것. 눈도 눈썹도 검은 꽃잎처럼 껌뻑이고 있었고, 그의 손등이 내 입술에 닿을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었다.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았다. 홍수가 나고 돼지가 떠내려가고 맨홀에 갇혀 누군가 죽어 나가는데도 입술 근처의 감각은 유실되지 않았다. 오만 가지 생각과 결합하려고 거품처럼 떠오르다가도 어디 가닿지 못하고 국지성 호우 속에 갇혀 있었다.

 

[시평]

사랑은 국지성 호우이다. 세상을 향해 수백만 개의 발을 내던지고 있는, 아무러한 생각 없이 퍼부어 대고 있는, 그래서 한 발짝도 내디딜 수가 없는 그 빗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은 거, 그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수십 년간을 갇혀 있는 듯한 사람을 찾아서, 비록 다리에 깁스를 했어도, 그래서 한 발에 슬리퍼를 꿰어 신고서라도 만나러 달려오는 것, 온갖 수많은 빗발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달려오는 거, 그것이 바로 사랑이리라.

장맛비가 너무 강렬하게 쏟아져 홍수가 나고 세상이 물난리가 나도, 그래서 맨홀에 갇혀 누군가 죽어 나가도, 장맛비에 사람도, 돼지도 떠내려가도, 오직 빗속에서 온통 비를 맞으며 달려와 받쳐주던 우산과 그 손과 가까이 느끼던 그 입술과 숨결만이 생각나는 것, 이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사랑은 어쩌면 그 이상인지도 모른다. 그 이상 강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상의 우리를 마비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힘들게 했던 오만 가지 생각과 결합하려고, 거품처럼 떠오르다가도 어디 가닿지도 못하고, 마침내는 국지성 호우 속에 갇혀 버리고 마는 것, 이것이 사랑인지 모른다. 한 생애를 시를 위하여 국지성 장맛비 마냥 강렬하게 살다간 시인의 명복을 빈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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