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1895년 12월 26일에 서재필(1864~1951)이 11년 만에 미국에서 귀국했다.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미국으로 피신한 서재필은 1890년에 필립 제이슨이란 이름으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1894년에 의사 면허를 받았으며 철도 우편국 창설자 조지 암스트롱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인 조지 암스트롱은 15대 미국 대통령 부캐넌의 사촌이었다. 고종은 그를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했다.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 일본인 신문 ‘한성신보’가 고종을 맹비난했다. 이러자 정부 신문의 필요성을 깨달은 박정양·이완용 등 정동파 내각은 고종을 설득해 서재필에게 신문창간비 4천원과 신문사 사옥을 제공했고, 서재필은 4월 7일에 한글과 영문으로 된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독립신문 창간일 4월 7일은 오늘날 ‘신문의 날’이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가 1897년 말에 영국에서 출간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는 ‘독립신문’이 언급돼 있다.

“서울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서재필 박사가 1896년 4월에 독립신문을 창간한 것이다. 이 신문은 영어와 조선어판으로 3주에 한 번씩 나오는 두 쪽 신문이다. ‘독립신문’은 1897년 초에는 네 쪽으로 증면되고 영어판과 국어판으로 나뉘어 발행되었다. 그 자신의 나라와 시국에 대해 무지한 조선 사람과 서울의 떠도는 소문에 그가 희생당했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사람들은 이러한 시도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였으며 국민을 계몽하는 데 최대의 효과를 발휘했으며, 사법부와 행정부의 비행에 대하여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비숍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p453)

고종의 헤이그 밀사였던 헐버트도 ‘대한제국 멸망사’에서 ‘독립신문’을 언급하고 있다.

“한가지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1895년부터 서재필 박사가 중추원 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추원은 처음에는 상당한 권한을 행사했으나 점차 세력권 밖으로 멀어졌다. 그러나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자 서재필 박사의 출현은 러시아의 세력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중략)

이 해(1896년) 4월 7일에 서재필 박사에 의해 처음으로 외국어 신문이 창간됐다. 그 신문의 이름은 The Independent 였으며 일부는 한글로 인쇄됐다. 처음부터 그 신문은 한인들 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독립협회가 조직되도록 만든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됐다. (헐버트 지음·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p189, 192)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 논설에서 1)공명정대한 보도 2)한글로 발행 3)외국인에게 조선 사정을 알게 하고자 영문도 발행 4)정부 관원의 잘잘못을 감시 5)남녀노소, 신분·빈부 차별 없이 모든 국민에게 외국과 국내 사정을 알게 하려는 것임을 강조했다.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 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알릴 터이요.”

정동파 내각은 독립신문 보급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먼저 농상공부는 신문 발행을 공식허가해 관보와 동일한 제2종 우편물로 값싸게 우송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고, 학부와 내부는 학교와 지방에 신문 구독을 지시했으며 각 관청에 기자들의 출입을 허용해 취재 활동을 보장해 줬다.

독립신문은 발행 초기에 정부의 시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가의 자주독립을 역설하며 국민계몽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고종과 정동파 내각 그리고 서재필은 모처럼 밀월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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