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흥부놀부전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내용을 담은 우리의 고전 소설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흥부놀부전을 어른들로부터 귀를 쫑긋 세우며 안 듣고 자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 말할 것 없이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결국에 화를 당한다는 단순한 줄거리의 소설이다. 마음이 맑았던 코흘리개 적 들었던 흥부놀부전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재미가 있었다. 그때 받은 감명은 세월이 흘러도 결코 빛이 바래지를 않는다.

흥부놀부전이 한국 사람의 인성(人性)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흥부놀부전이 인성교육에 미친 기여는 사실상 헤아리기가 불가능할 정도라 생각된다. 도덕 교과서가 가르친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도시가 과밀해지면서 범죄가 느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국 도시의 밤거리는 세계 어느 도시보다 안전하다. 사이코패스(Psychopath)의 흉악 범죄가 더러 있기도 하나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는 그 빈도(頻度)에서 비교가 안될 만큼 적다. 그것은 흥부놀부전과 같은 소설이 가르친 권선징악의 교육 효과가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선(善)한 사람의 끝은 좋아도 악한 사람의 끝은 결코 좋지 않다.’ 흥부놀부전 이야기와 함께 이런 소리 한두 번 집안 어른들로부터 안 듣고 자란 사람도 한국사람 사이에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 눈이 트이면서 사람의 행불행이 흥부놀부전의 줄거리와 같이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충격에 빠지기도 한다. 흥부와 같이 가난하고 착한 많은 사람 중에서도 가난과 불행에서 끝내 못 벗어나는 사람도 많으며 심보는 놀부와 같지만 그 부자가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도 많다.

또 가난하다고 해서 사회적 약자일지는 몰라도 모두가 반드시 흥부와 같이 착한 사람은 아니며 부자라고 해서 다 놀부와 같이 악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를 가릴 것 없이 되도록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은 타고난 천성만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흥부놀부전이 가르치는 것과 같은 교육 효과가 힘을 발휘해서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흥부놀부전은 귀가 따갑게 들어오는 것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처럼 재미나다.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흥부는 다리가 부러져 고통 받는 제비를 보고 자기 고통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정성껏 상처를 보살피고 다리를 이어 낫게 한다. 다리를 다시 찾게 된 제비는 이에 보은하기 위해 박씨 하나를 물어다준다.

이 박씨를 땅에 심었더니 박이 주렁주렁 열린다. 박이 익자 이박 저박을 슬근슬근 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박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지고 고대광실이 튕겨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흥부는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에서 거부가 되고 귀한 몸이 됐다. 흥부의 착한 행동에 대한 보답이었다. 정말 신나는 얘기다. 한편 이 얘기를 들은 놀부는 멀쩡한 제비다리를 부러뜨리는 행악(行惡)을 저지르고 자기가 부러뜨린 그 제비다리를 좋은 일을 한답시고 고쳐준다. 병 주고 약 주었다. 그 제비도 역시 박씨를 물어다주었다. 흥부의 횡재를 떠올리고 그 같은 횡재를 꿈꾸며 그 박씨를 땅에 심었다.

그런데 박이 익어 탔을 때 그 박에서는 금은보화가 아니라 놀부를 혼내주는 도깨비가 나오고 오물이 쏟아져 나왔다. 악행에 대한 징벌이며 제비의 복수였다. 악한 사람이 혼쭐이 나고 거지가 되는 이것 역시 정말 신나는 이야기다.

세상이 이렇게 흥부놀부의 얘기와 같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정말 그렇다면 사람 사는 일의 묘미와 긴장, 스릴(Thrill)은 많이 떨어질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사람의 행불행이 흥부놀부전이 가르치는 것과 같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칙이 분명히 느껴지게 전변(轉變)한다고 해서 절대로 나쁠 일은 없을 것이다.

흥부와 놀부 형제의 이야기는 물론 픽션(Fiction)이지만 유산을 장자가 독식해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웠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 만약 지금 시대에 놀부와 같은 욕심쟁이, 심술 꾼 형이 있다면 다른 가족 성원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놀부와 같은 형들도 많고 그 때문에 피를 나눈 형제들이 법정으로 가 다투는 일도 허다하다.

그것이 선과 악이 뒤섞여 돌아가는 사람 사는 세상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돈 많고 힘을 가진 사람에게 짓밟히기 마련이다. 이 같은 불의는 사람의 천성에만 맡겨서 해결될 일은 아니며 흥부놀부전을 가르치는 권선징악의 교육만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마땅히 정의로운 권력과 법, 정치지도자와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정의롭게 살고 그런 삶을 솔선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있어야 하며 개인의 일상 시시비비를 가난하고 힘없다는 이유로 짓밟히지 않도록 정당하게 가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일수록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이야 어찌되든 제 이익 챙기기에 바쁘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

우리 북녘 형제 동포들이 헐벗고 굶주린다. 이들은 잘 사는 남녘 형제들을 인정머리 없는 놀부 형쯤으로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남녘 사람 중에는 배고파 밥 한 술 얻어먹으러 온 흥부의 뺨을 밥 푸던 주걱으로 때려 모욕을 주었던 놀부 마누라 같은 형수도 그것을 고소해했을 놀부 같은 형도 없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착하고 배 주리는 북녘 형제들의 고통을 우리가 배를 주려본 경험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므로 우리는 놀부가 아니다. 놀부는 과거의 무력 도발 죄행에 대해 반성은커녕 사과 한마디 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의 권부와 군부다.

그들의 심보가 바로 놀부다. 이들이 착한 흥부가 되는 날, 북녘 형제들의 배고픈 고통은 해소되고도 남을 것이지만 놀부 심보의 김정일의 개과천선은 좀처럼 잘 이루어지지가 않는 것이 안타깝다. 그가 흥부와 같은 마음을 가진 형인 남녘 형제들을 두고 타 민족 중국에 가서 동해 출구를 내주는 매국 행위를 서슴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별 것이 없다. 왜 그는 이렇게 가까운 길을 놓아두고 그렇게 먼 길을 비루하게 돌아가려고만 하는가. 그가 통 큰 사람이 맞는가. 혹여 우리에게도 뭔가 저들을 놀부로 만든 잘못이 있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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