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김덕수

불교에서는 無所有를 이야기합니다. 요즘 같은 물신만능주의의 정점에서 과연 무소유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럼 먼저 무소유의 어원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미한 세계 즉 번뇌에 얽매어 욕계, 색계, 무색계인 삼계에 생사유전이 쉴 새 없이 반복되는 삶이 중생계입니다. 욕계란 말 그대로 탐욕의 세계 특히 식욕, 음욕, 수면욕이 치성한 세계를 말합니다.

색계는 욕계와 같은 탐욕은 없으나 미묘한 형체가 있는 세계요, 무색계는 색계와 같은 미묘한 형체도 없고 순정신적 존재의 세계를 말합니다. 색계가 색신에 얽매여 자유를 얻지 못함을 싫어하여 더 나아가서 물질을 여의고 순정신적인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이 무색계의 제3천인 무소유처에서 소연이 아주 없는 것을 관하여 無所有의 해를 얻고 그 수행한 힘으로 태어나게 되는 곳이 무소유처지요 무소유천입니다. 無所有란 여기서 유래된 개념입니다. 난해한 말들로 염증날 수도 있으나 마음과 육신이 맑아지면 금방 이해되는 개념들입니다. 심신이 맑아지고 맑아져 정심자리에 가면 탐진치 삼독이 끊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집착이 끊어진 곳 그 곳이 무소유의 자리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스님께서 무소유는 ‘적게 소유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요. 또 요즘 최고급 외제차에 지구상에서 최상류층의 소비를 구가하시는 스님들은 이제 무소유의 개념도 바뀌어야 한다고 강변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무소유를 이번 지면의 주제로 다루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탐진치 삼독을 이야기할 것 없이 조금만 호흡을 가다듬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발 물러나 세상을 관조하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그러면 내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은 잠시 나에게 의탁된 존재란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저 이 세상에 와서 잠시 사용하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하는, 세상으로부터 빌려온 물건들인 것입니다. 그래야 후손들이 살아갈 여지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내 것이 존재한다는 소유욕, 즉 집착이 점점 치성하게 되더니 모든 중생들이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인 지구까지 오염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땅에도 천박한 자본주의가 들어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부모형제 간에 재산을 두고 법정소송을 너도나도 벌이는 한심한 세상이 된 지 오래요, 더 나아가 물질에 팔려 부모자식마저 죽이는 아수라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곧 내것 네것이 있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오직 갈등과 투쟁만이 판치는 욕계의 세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럼 우리 조상들은 물질에 어떠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을까요? 인간의 삶에서 물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가치의 중요성이 퇴색된 적은 없습니다. 단지 물질과 재물이 인간의 삶에서 지극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되 올바른 정신으로 물질을 잘 다스리는 것에 뜻을 두었습니다. 정신을 물질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물질에 정신이 팔리는 것을 그렇게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도의 정신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왔고 물질이 개벽된 지금의 세상에 더욱 그 가치가 빛을 발할 것입니다. 주역에서도 이재를 말합니다.

대인들은 축재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다스리는 데 뜻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구석지고 물자의 흐름이 원활치 못한 곳을 잘 다스리고 알선해 이 우주가 조화롭게 되는 데 平生 진력합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위대한 장부요 정치가이셨던, 호가 厖村이며 시호는 翼成公이신 황희 어른의 삶을 들여다볼까 합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는데 1394년(태조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 학관으로 제수되면서 평생 나라와 백성들을 향한 공평무사한 공직자로서의 삶과 대인으로서의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합니다.

세종대에는 국정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깊은 경험과 식견 및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18년간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의 최고 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세자사상정소도제조 등을 겸임하고 내외의 중심을 진정시키면서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십니다.

이처럼 명망 있는 명재상의 집은 익성공께서 출사하시면 자당께서 ‘아범이 있을 때는 아욱국이라도 끓여 먹었는데 이젠 그것도 어렵게 됐구나!’라고 탄식하실 정도로 가난하셨다고요. 방촌 선생께서는 고쟁이 한 벌로 사시며 평생 검소하시어 살아생전에 청백리에 등재된 분이시죠.

또 당신의 장례에는 딸들이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어서 찢어 입었다는 이야기며 계란유골 등 숱한 이야기가 감동을 줍니다. 요즘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그처럼 고위직에 계신 분이 그토록 가난하게 사신 것이 절대로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항상 집안의 어른으로서 집안과 주위를 대인심의 견지에서 공적인 일과 급한 일을 먼저 보살피셨던 것이죠. 주인의식이 투철한, 곧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이 땅의 선비이기에 가능하셨던 삶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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