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의친왕(義親王)은 미국 유학생활에 어려움을 느껴 1905(광무 9)년 3월 본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도쿄(東京)으로 돌아왔으나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황명(皇命)에 의하여 다시 미국으로 갔는데 학자금 명목으로 5만원을 보냈다.

그 이후 의친왕은 다시 같은 해 8월 28일 도쿄(東京)로 왔는데 이러한 소식을 알게 된 엄귀비(嚴貴妃)가 이근상(李根湘)을 도쿄(東京)로 보내 은 300만원을 주며 귀국하지 말라고 종용하였지만 그는 더 이상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1906(광무 10)년 4월 7일 귀국하였다.

의친왕이 귀국한 지 3일 후인 4월 10일에 대한제국(大韓帝國) 육군부장(陸軍部長)으로 임명되며, 이어서 4월 19일에는 참모관(參謀官)으로 임명되었다.

3개월 후인 7월 12일에 고종황제의 칙령(勅令)에 따라 창립한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 제4대 총재(總裁)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의친왕이 귀국한 해인 1906(광무 10)년에 주목할만한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의친왕이 비밀리에 천도교(天道敎)에 입교(入敎)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필자가 입수한 천도교 경성교구(京城敎區)의 천민보록(天民寶錄) 제3호에 의친왕의 가족 명단(家族名單)이 수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구체적으로 천민보록(天民寶錄)은 1911년 8월 17일 천도교 종령(天道敎宗令) 제88호에 의해서 작성된 것으로서 이것은 일정한 기준 이상의 독실한 교인들을 가족 단위로 성명(姓名)을 기록해 놓은 교인 명부(敎人名簿)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친왕이 천도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일본에서 손병희(孫秉熙)를 알게 되면서 시작된 것인데 관련 일화(逸話)를 소개한다.

“어느 날 손병희는 쌍두마차를 타고 동경 시내를 달리다가 의친왕의 행차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타국에서 만난 의친왕에게 조선백성으로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급히 마차에서 내려 두 손을 읍하며 경의를 표시했다. 그때 시종관이 의친왕에게 영어로 무엇인가 아뢰었다. 이 모습을 본 손병희는 시종관을 노려보며 큰소리로 꾸짖었다. ‘너가 국왕을 모시고 다니는 놈이냐! 내 나라 국왕을 모시고 외국말이 어디 당한 일이냐. 너 같은 놈이 있으니 우리나라가 이 꼴이야!’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의친왕은 차에서 내려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과연 옳은 말이오. 이만 진정하시오’.”

이러한 일화를 통하여 한 나라의 황족(皇族)이면서도 측근의 잘못된 처신을 인정하는 의친왕의 진솔하고 겸손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의친왕이 손병희의 인격을 흠모하여 자주 방문하게 되었는데 손병희 또한 때로는 의친왕의 부름을 받고 국가(國家)의 대계(大計)와 경륜(經綸)을 설파하였다.

한편 손병희는 5년간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1906(광무 10)년 1월 28일 귀국하고 의친왕은 4월 7일에 귀국하였으며, 그 이후 의친왕은 손병희의 인도에 따라 비밀리에 천도교에서 입교식(入校式)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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