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충격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정의당 김종철 대표가 같은 당 장혜영 의원을 성추행 했다는 소식은 정말 믿기 어려웠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김 대표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정의당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에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성추행 사건으로 치러지는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이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비극적 사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철 대표가 관련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전격적으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정의당 지도부도 단순한 대표직 사퇴가 아니라 당 징계절차를 통해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 발 빠른 대국민사과도 잊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정의당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 앞에 내놓은 최소한의 ‘정의당 다움’이라 하겠다. 피해자인 장혜영 의원도 고심 끝에 진실을 알리게 됐다고 말했다. 장 의원인들 큰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정의당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몰랐겠는가. 그러나 침묵하거나 감춘다면 그건 악의 편이 된다는 사실, 오늘의 정의당보다 내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 그리고 여성인권과 성평등을 외쳤던 정의당 의원으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장 의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제 정의당은 어떻게 할 것인가. 늘 그렇듯이 예방이 제일 중요하다. 그럼에도 병이 났다면 철저한 진단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수술을 해야 할 병이라면 칼로 도려내야한다. 이처럼 단순한 수순이 매번 뒤틀리는 것은 병을 병으로 보지 않고, 중병을 감기 정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돌팔이 진단’이 그들의 이익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결과 조직 내부부터 썩어가고 있음을 그들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명의(名醫)’가 존중을 받는 것이다. 당으로 치면 지도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다.

정의당 지도부가 결국 차기 당 대표 선출 이전까지 비대위 체제로 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다. 당분간 ‘정의당 해체’ 수준의 혁신을 이뤄내지 못하면 미래는 더 어둡다. 따라서 김종철 대표에 대한 엄중한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는 이미 정치권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당의 체질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 당장은 ‘세대교체’ 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 연장에서 코로나19 이후의 시대변화를 주도하는 ‘생활형 진보정당’으로 거듭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정의와 노동, 인권 등의 거대담론은 좋다. 그러나 그 큰 그릇으로도 담아내지 못하는 ‘일상의 피눈물’을 먼저 살펴야 한다. 시대가 그렇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의당만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해 낼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의당은 오는 4월 재보선을 고민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 지금 당의 존망을 건 위기가 닥쳤는데도 선거의 표심부터 고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몰염치한 행태는 정의당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제 두어 달 남은 선거준비에 힘 쓸 것이 아니라, 당 혁신에 매진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야 말로 진짜 정의당의 것이다. 정의당 비대위가 오는 4월 재보선에서 모든 지역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야 하는 이유다. 정당정치에서 뼈를 깎는 고통이란 게 그런 것이다. 역대 그런 정당은 없었다. 그렇게 통렬하게 스스로를 꾸짖고 책임을 진 정당은 없었다. 정의당이 그 새로운 역사를 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년 초 대선을 비롯해 또 몇 개월 후에는 지방선거가 잇달아 예정돼 있다. 정의당이 조금 더 길게 호흡해야 할 이유다. 당장의 이익에 매몰돼 버리면 정작 더 필요할 때는 더 이상 국민의 지지를 호소할 명분이 사라지고 만다. 정의당마저 그 많은 정당들 가운데 하나가 돼버리는 순간 정의당은 진보정당으로서의 법통성을 잃게 된다. 굳이 정의당이 존재해야 할 필요도 없어진다. 물론 고달프고 힘든 여정이지만, 그러나 운명이다.

시대변화에 따라 정치환경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코로나19 이후의 정치환경은 생각보다 더 큰 변화를 촉발시킬 것이다. 먼저 국민의 마음부터 변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오늘 이 순간에도 한국정치를 쥐락펴락하는 두 거대 진영의 ‘패싸움’이 한창이다. 언제까지 이대로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거대한 성채가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럴 가능성이 이전보다 더 높아졌다. 시대의 변화, 삶의 양식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당은 최근의 성추행 사태를 당 일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두 거대정당의 횡포에 맞서 수많은 작은 정당들이 명멸해 왔지만, 정의당은 그 파고를 건너서 뚜벅뚜벅 오늘 여기까지 왔다. 그 바탕에는 진보정당에 대한 기대치가 저변에 온전히 녹아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정치에서 정의당 같은 진보정당 하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는 국민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도 잘 새겨야 한다. 그리고 두 거대정당의 패싸움에 휘말려 엉뚱한 정당에 표를 찍지만, 그래서 내심 정의당에 미안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정의당의 단단한 정치적 자산이다.

어쩌면 ‘정의당의 시간’이 더 빨리 올 수도 있다. 두 거대정당이 온 몸으로 가로 막고 있는 ‘특권 정치’의 거대한 둑이 터질 날이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의당은 가장 유력한 대안이다. 아니 다른 대안은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면 소탐대실의 패착은 절대 금물이다. 거대담론을 붙잡고 있을 만큼 민생은 여유롭지도 못하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현실정치를 덮칠 수도 있다. 정의당은 그날을 준비해야 한다. ‘일보 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라고 불러도 좋다. 지금은 후퇴의 시간이다. 재보선 후보를 놓고 좌고우면할 때가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전면적인 무공천을 선언하는 것이 옳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