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뮤지컬로 더 유명해진 ‘명성황후’는 을미사변으로 시해당한 민왕후(1851∽1895)의 시호이다. 그런데 왕후의 시호는 여러 번 바뀌었다.

1895년 10월 15일에 고종은 왕후의 승하를 반포했다. “8월 20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왕후가 곤녕합(坤寧閤 경복궁 건천궁 왕비의 침실)에서 승하했다.”

10월 19일에 왕후의 시체를 재궁(梓宮)에 넣었고, 10월 22일에는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를 순경(純敬)으로, 능호를 숙릉(肅陵)으로 했다.

여담이지만 1882년 임오군란 때 민왕후가 충주로 피난 갔을 때 대원군은 국상을 선포했다. 이때 민왕후의 시호는 인성(仁成), 능호는 정릉(正陵)이었다(고종실록 1882년 6월 17일). 그런데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4개월 되는 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고종이 아관파천 중인 1897년 1월 3일에 의정부 찬정 김영수가 대행 왕후의 시호를 다시 정할 것을 상소했다.

“지난해에 시호를 정할 때 역신(逆臣) 김홍집이 그 일을 주관했기 때문에 의식 절차가 미비하고 모자람이 있었으니 존호(尊號)를 다시 정하소서.”

이러자 고종은 대행 왕후의 시호(諡號)와 능호(陵號) 등을 다시 논의하라고 명했다. 1월 6일에 의정부는 대행 왕후 시호의 망(望)은 ‘문성(文成)’ 【온 천하를 경륜하는 덕을 갖춘 것을 ‘문(文)’이라고 하며 예법과 음악을 밝게 갖춘 것을 ‘성(成)’이라고 한다.】, ‘명성(明成)’【온 천하를 밝게 내리 비치는 것을 ‘명(明)’이라고 하며 예법과 음악을 밝게 갖춘 것을 ‘성(成)’이라고 한다.】, ‘인순(仁純)’ 【어진 일을 하고 의로움을 행하는 것을 ‘인(仁)’이라고 하며 중정(中正)의 덕을 갖추고 화락(和樂)한 것을 ‘순(純)’이라고 한다.】으로 하고, 능호(陵號)의 망은 ‘홍릉(洪陵)’ ‘희릉(熹陵)’ ‘헌릉(憲陵)’으로 정해 올렸다. 그러자 고종은 1순위로 올린 그대로 시호는 문성, 능호는 홍릉으로 정했다(고종실록 1897년 1월 6일).

한편 고종은 1897년 2월 20일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3월 2일에 고종은 대신들과 대행 왕후의 시호를 다시 의논했다.

고종이 말했다. “오늘 경들을 부른 것은 대행 왕후의 시호(諡號)를 다시 의논하기 위해서이다. 열성조(列聖朝)의 시자(諡字)와 서로 같은 것이 10여 번이나 되지만, 오늘 문성(文成)이라는 두 글자는 정종(正宗)의 시호 글자와 서로 같을 뿐 아니라 대수(代數)가 아주 가깝기에 못마땅한 점이 있다. 다시 부망(副望 2 순위)으로 정하려고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이러자 김병시 등은 개정(改定)하는 데 대해서 공경함을 금할 수 없다고 찬성했다. 그리하여 민왕후의 시호를 ‘명성(明成)’으로 고쳤다(고종실록 1897년 3월 2일).

그런데 1년이 지나도 명성왕후의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다.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이 탄생했다. 고종은 황제에 즉위했고 명성왕후도 명성황후로 추책(追冊)했다.

11월 21일에 명성황후에 대한 국장(國葬)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시해 후 2년 1개월 만이었다. 황후는 서울 청량리 밖 홍릉에 안장됐다. 장례비는 쌀로 4만 4300여섬 규모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10억원에 달했다(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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