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민왕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지 2일째 되는 8월 22일에 ‘뉴욕 헤럴드’ 서울 특파원 코커릴 기자는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은 창백했다.

8월 23일에 영국 총영사 힐리어는 북경주재 오코너 공사에게 왕비 시해 관련 사항을 보고했다. 여기에는 러시아 사바틴의 증언도 포함돼 있었다.

8월 26일에 미국 대리공사 알렌과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외부대신 김윤식이 보낸 문건에 의문을 제기하고 왕후 시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권고하는 문서를 보냈다.

이윽고 미국 대리공사 알렌은 시해 당일 현장에 있었던 궁녀와 시위대 연대장 현흥택, 미국인 다이 장군의 목격담을 본국에 보고했다.

 

“궁녀 : 일본인 한 명이 왕비를 쓰러뜨린 뒤 왕비의 가슴팍에 세 번이나 신발을 신은 채 뛰어올랐고 왕비를 찔렀습니다.

현흥택 : 왕비를 구하기 위해 옥호루에 뛰어들었습니다. 맞아서 쓰러졌고, 몸이 묶인 채 심하게 구타당해 왕비가 다른 방으로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지만 살해당하는 장면은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다이 장군 : 일본군 정규군이 앞장서서 궁궐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군대는 잔혹 행위를 지켜보았습니다.”

 

프랑스 공사관의 G.르페브르도 프랑스 외무성에 보고했다.

“지난 9일 전보를 통해 알려드린 10월 8일 궁궐에서 발생한 심각한 사건의 경위를 현재 정확히 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내용이 서로 모순되기까지 해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은 전반적인 사실에 대해서만 보고하겠습니다.(중략) 10월 8일 새벽 4시경, 군인 수백 명이 장교들과 함께 병영을 이탈해 궁궐로 진군했습니다. … 이 군인들은 궁궐 안으로 진입했으며 왕의 거처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담을 넘어 궁궐 안으로 잠입한 일본인 40~50명과 합류했습니다. 검과 총으로 무장한 일본인들과 함께 군인들은 왕과 왕비의 거처를 장악했습니다. 궁내부대신과 왕비를 모시는 3~4명의 궁녀들이 살해당했으며 왕비도 시해당한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왕비의 시신은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 일본 공사관이 이 사건을 지휘한 것을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일종의 공모가 있었다고 생각할 만합니다. 일본인 40~50명이 개입된 음모를 일본 경찰과 미우라 공사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일본군 당국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중략) 10월 7일 밤부터 8일 새벽까지 야간 근무를 하던 러시아인 사바틴은 목격담을 들려주었습니다. … 사바틴 씨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일본군 당국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할 만합니다. 10월 8일 오후, 본인과 각국 외교관들은 일본 공사를 찾아가 이 날 아침 궁궐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아는 정보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각국 외교관들은 일본이 왕후를 시해했다고 확신했다. 이럴 즈음에 ‘뉴욕 헤럴드’ 서울 특파원 코커릴은 을미사변에 일본이 개입했다는 기사를 뉴욕 본사에 보냈다.

‘뉴욕 헤럴드’의 특종 기사에 세계 각국은 경악했다. 유럽과 미국 등은 일본을 비난했고, 일본 내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철저한 진상 규명과 연루자 처벌을 일본 정부에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자 9월 1일에 미우라 공사는 관련자 48명과 함께 소환됐고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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