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3일 전 버스에서 내리던 한 시민이 사망했다. 경기도 파주에서 일어난 일이다. 퇴근길 21세 청년은 왜 목숨을 잃게 됐나?

버스하차 사망사고는 끊임없이 반복됐다. 1995년 성남에서 운행되던 버스에서 내리던 시민은 치마가 차문에 끼어 사망했다. 2001년 서울 종로 버스에서 하차하던 시민이 반코트 옷자락이 차문에 끼어 사망했다. 2012년엔 화성에서 같은 유형의 사고로 중학생이 사망했다. 어린이 사망사고도 잇따랐다. 2009년과 2013년에는 7살 어린이가 학원 통학차량 문틈에 옷이 낀 상태로 끌려가다 사망했다.

부상당한 사례도 많다. 2015년 1월 중학교 1학년 학생은 차에 발을 올리는 순간 버스가 출발해서 굴러 떨어졌다. 앞바퀴에 발이 낀 채 50여 미터 끌려갔다. 근처를 지나던 시민이 엄청난 속도로 뛰면서 소리를 질러 차량을 멈추게 하는 바람에 살 수 있었다. 학생은 무릎 뼈가 골절됐고 인대와 근육이 파열됐다. 전치 8주의 부상으로 큰 고통을 당했다.

2017년에는 한 시민이 하차하던 중 문이 닫혀 옷의 끈이 끼었고 10여 미터 끌려가다 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2018년엔 충남 태안 터미널에 정차한 버스에서 내리던 78세 할머니가 옷이 끼어 중상을 입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공통적으로 “다 내린 줄 알았다” “못봤다” “못 봤으니 출발했지”라고 말한다. 다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무책임한 말이다. 운전자의 책무를 망각한 말이다. 운전자의 본분이 뭔가? 승객이 안전하게 타고 안전하게 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못 봤다거나 몰랐다는 반응을 보이는 건 형사적 책임을 면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못 봤다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주의 깊게 안 봤다’고 말해야 옳다.

우리 사회에서는 버스에서 하차하다가 옷 또는 끈이 끼어 사망하는 사고가 날 경우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승객이 부주의로 사망한 거라는 생각이 널리 펴져 있다. 재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버스회사는 물론 운전자에게 책임을 명확히 지우는 풍토가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승차 또는 하차 때 사고가 나는 경우 운전자에 대한 형사책임을 확실히 지우는 법제 정비가 있어야 한다. 사망사고가 나는 경우 살인죄에 준해 처벌해야 한다. 회사에게도 징벌적 손해배상의무를 강하게 지워야 한다. 사망사고를 거듭 야기하는 회사는 면허취소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운전자나 버스회사가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풍토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버스회사는 법제 정비에 관계없이 승하차 확인 의무를 태만히 해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하고 점검해야 한다. 적정인원을 배치해서 운전자가 시간압박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난 1997년 대법원 판례는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1995년 11월 경기도 성남시에서 운행되던 버스에서 승객이 내리던 중 몸은 땅에 내려왔지만 치마는 발판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문이 닫혔고 치마가 걸린 승객이 사망한 사건이다. 대법원은 ‘개문발차’가 아니라면서 무죄판결을 내렸다. 치마가 보통 치마보다 1미터씩 긴 특별한 치마도 아닐 것이다. 내려오면서 공기의 작용으로 치마가 살짝 들렸을 것이다. 들렸던 치마가 버스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에도 문을 닫아 사망에 이르렀다. 조금 긴 치마라고 해도 치마가 발판을 벗어나는 걸 보고 출발해야 한다.

사람이 죽었음에도 대법원 판사들은 ‘개문발차’냐 아니냐 공방을 벌이다가 무죄판결을 내렸다. 2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법원의 생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사법부의 판단이 이처럼 생명존중의 사고가 미약하고 법 형식논리에 빠져 이상한 판결을 하는 나라다. 다른 권부에 있는 사람들 생각은 얼마나 다를까?

이번 사고는 ‘롱패딩 입은 20대 여성 뒷문에 걸려 사망’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고 있다. 롱패딩 입은 게 문제라는 투다. 롱패딩을 입었든 짧은 옷을 입었든 몸의 일부이다. 승객이 완전히 차에서 분리되는 걸 보고 차를 출발시켜야 한다. 사람이 먼저고 생명안전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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