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공자가 태어난 곳은 노나라 창평향의 곡부(曲阜)라는 마을이었다. 그의 집안은 4대 전인 공방숙 대에 송나라에서 노나라로 왔다. 공방숙 아들이 백하이고, 그의 아들이 공자의 아버지 홀이며 자는 숙량이다. 공자 아버지 홀은 안씨 집안의 딸과 살았는데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 뒤 이구의 신에게 빌어 공자를 낳았다. 노나라 양공22년(기원전 551)이었다.

갓 태어난 공자는 정수리가 움푹 패여 있고 그 둘레가 마치 둔덕처럼 올라와 있었으므로 구(丘)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자는 중니(仲尼)다. 그가 어릴 때 아버지가 죽어 노나라 도읍 동쪽의 방산에 장사를 지냈는데 공자는 철이 들면서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했으나 어머니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녀는 공자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소년시절에 제기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놀이를 즐겼다.

얼마 뒤 그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을 몰랐으므로 모친의 무덤을 노나라 도읍 오보라는 곳에 임시 매장을 했다. 얼마 있다가 아버지의 장례 때 수레를 끌었던 사람의 어머니가 아버지 무덤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비로소 두 사람을 합장할 수가 있었다. 공자는 가난하게 자랐으므로 어른이 된 뒤 계씨의 창고지기가 되었고 한때는 목장지기도 했다. 그가 관리하는 가축들은 잘 자랐으므로 나중에 노나라의 사공(司空)으로 발탁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인 남궁경숙이 노나라 왕에게 요청하여 허락을 받아 공자와 함께 주나라로 공부하러 떠나게 된다. 공자는 예에 대하여 배우는 일방 노자를 찾아갔다. 공자가 돌아가려고 할 때 노자는 전송을 하며 말했다. 사람을 보내는데 부자는 재물로써 송별하고 어진 사람은 말로써 송별하니 나는 부자가 아니므로 인자의 흉내나 내 볼까. 총명하고 통찰력이 깊으면서도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남을 지나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말을 잘하고 박식하면서도 스스로 몸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은 그것은 남의 악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사회 속에 사는 사람은 자기 주장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얼마 뒤 노나라로 돌아 온 공자는 제자들의 수가 차츰 많아지기 시작했다.

공자가 35세 때의 일이었다. 노나라 소공은 나라 안에서 가장 실력자인 계평씨를 처벌하려고 했다. 그것은 닭싸움의 시비에서 비롯되었다. 계평자가 후소백에게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소공은 계평자를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는데 계평자는 맹씨와 숙손씨를 동원하여 소공의 군대를 물리쳤다. 되레 불리해진 소공은 제나라로 망명했다. 제나라는 망명한 소공에게 건후의 땅을 주었다. 노나라의 정치제도가 무너진 것은 이 무렵부터다.

공자가 제나라로 간 것도 그 즈음이었다. 공자는 제나라의 경공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먼저 대부인 고소자의 가신이 되었다. 그 무렵 제나라에서는 조정 의식에 사용되는 음악이 왕성했다. 공자는 그 중에서도 소곡(순임금이 만든 음악이라고 전해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3개월 동안 침식을 잊을 정도로 배우기에 매우 힘썼다. 마침내 공자의 열성적인 태도가 소문이 나서 경공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드디어 공자는 경공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다.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느냐고. 공자가 대답했다. 임금은 임금으로서, 신하는 신하로서, 어버이와 자식은 나름대로 자기의 본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경공은 그 말을 인정하고 다시 정치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먼저 나라의 재정을 절약해야 한다고 공자가 대답했다. 경공은 그 말에도 만족하여 공자를 조정의 대신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재상 안영이 나서며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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