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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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이칭이 많다. 한수(漢水) 혹은 아리수(阿利水) 등등, 그러나 뜻이 같은 말이다. 아리수의 ‘아(阿)’는 크다는 뜻이고 한수의 ‘한(漢)’도 같은 뜻이다. 크다는 뜻의 우리말이 한글이 없던 시대에 표기됐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아리수란 이름은 고스란히 우리말로 적은 표기다.

처음 한강을 개척한 고대인들은 마한 사람들로 봐야 한다. 이들은 54개국의 하나인 ‘백제’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였다. 백제국이 마한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백제의 영토가 한강은 물론 지금의 경기도 안성지역에 이르기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안성’의 고지명은 백재(白城)로 백제라는 뜻이다. 안성천과 맞닿은 천안 직산 사산성(蛇山城)은 마한국의 수장국인 목지국(目支國)으로 비정된다. 두 나라가 서로 이빨을 물 듯 맞닿은 형국이다.

백제시조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해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한강유역이다. 온조는 목지국의 왕에게 허락을 받아 백제지역의 땅 일부를 빌려 나라를 세웠다. 처음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했으나 본래 백제국에서 일어났으므로 결국 백제라는 이름을 계승하게 된다. 온조 백제가 점점 강성해 지금의 평택까지 내려가 땅을 경계한다면서 목책(木柵)을 세우자 마한왕은 꾸짖기까지 한다. ‘처음에 우리에게 의탁해 나라의 일부를 떼어 주었더니 신의 없이 우리를 위협 하는가.’ 온조는 일시 물러서지만 결국 마한을 멸망시켰다.

백제는 한강을 넘나들며 하남, 하북 위례성을 쌓고 당시 변방을 위협했던 말갈, 낙랑과 전쟁하면서 기적 같이 국가를 융성시킨다. 4세기 근초고왕 때는 고구려도 백제에게 침공을 당해 큰 손실을 입었다. 신라는 소백산 죽령 새재 아래서만 겨우 숨을 죽이고 백제를 지켜봐야 했다. 한강 백제가 강했던 것은 일찍이 대륙과 해상을 통해 위진 남북조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강 유역에 산재한 낮은 구릉의 산에는 마한에서부터 백제시기의 유적이 많이 산재해있다. 표고 200m 이하의 야산 정상에 토성을 쌓고 때로는 깨뜨려진 돌과 흙을 다져 쌓은 판축성이 수 없이 찾아진다. 그런데 이 성에서는 일시 한강을 점령해 약 1백년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던 고구려 유적도 찾아지는 것이다.

서울 양천구 궁산(宮山)은 옛 지명이 공암(孔巖)으로 지리서인 여지승람을 보면 고구려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으로 불렸다고 돼 있다. 실지로 궁산에서는 몇 년 전 발굴결과 성 맨 밑 부분에서 고구려식 축성 유구가 확인됐다. 돌을 벽돌처럼 정연하게 장방형으로 다듬어 들여쌓기로 축성한 것이다. 이 방식은 고구려축성 기술의 전형적인 모양이다. 이 발굴조사에선 품(品)자형 치성(雉城)이 찾아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를 조사한 발굴조사단은 고구려식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삼국시대의 축성 형태라고만 언급했다. 지금도 산 정상을 돌면 적색 기와편이 수없이 산란하고 있다. 이는 분명 고구려식 와편이다.

궁산 유적은 본래 마한사람들이 구축하고 그다음 백제인들이 한강변을 지키는 작은 성으로 이용했으나 고구려가 진주하고는 석성을 구축했던 것으로 생각 된다. 고구려의 치소로서 인근의 개화산봉수(駐龍山城)와 연결되는 중요 유적이다.

한강변 여러 곳의 야산은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아온 터전이다. 역사시대 마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역사를 타임캡슐처럼 간직하고 있다. 이 유적들은 2천여년 수도 서울의 유구한 역사적 증거물이다.

한강변 지금은 양천, 강서, 고양시 등이 근린공원으로 조성한 여러 지역의 잊힌 유적들을 재발굴해 다시 조명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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