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 공사가 진행 중인 뒤편으로 고깔(원뿔) 형태의 건축양식이 돋보이는 돈덕전이 보인다.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정동교회며, 오른쪽에 보이는 2층 건물(아치가 설치됨)은 지금은 훼철되고 없는 구성헌이다. 군사가 파수를 보는 건물 망대도 서양식으로 세워졌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15
덕수궁 돌담 공사가 진행 중인 뒤편으로 고깔(원뿔) 형태의 건축양식이 돋보이는 돈덕전이 보인다.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정동교회며, 오른쪽에 보이는 2층 건물(아치가 설치됨)은 지금은 훼철되고 없는 구성헌이다. 군사가 파수를 보는 건물 망대도 서양식으로 세워졌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15

 

일제에 의한 훼철, 자료도 부족

돈덕전 복원 아닌 재건 논란도

지난 역사 바로잡는 계기 되길

오얏꽃이 떨어지던 날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11월 17일. 이날 이후 사람들은 날이 꾸무럭하여 스산하거나 쓸쓸할 때 “을사년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날의 원통함을 잊지 않기 위해 날씨를 형용하는 말로 새겨두었던 이 말은 “을씨년스럽다”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날의 비분강개(悲憤慷慨)함이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이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 호소하기 위해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의 특사를 파견하지만 일제의 방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이유로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고 이어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후 1910년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 조약이 체결됐으니 이것이 바로 ‘한일병합조약’이다. 이 조약의 발표는 8월 29일 정오에 있었으며,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이라 하여 ‘경술국치’로 불린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피었던 오얏꽃은 13년이 지난 1910년 8월의 어느 날, 일제의 무력 앞에 허무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무력으로 고종의 양위를 진행하기 위해 대한문을 지나 돈덕전으로 행진하는 일본군의 모습이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15
무력으로 고종의 양위를 진행하기 위해 대한문을 지나 돈덕전으로 행진하는 일본군의 모습이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15

피고 지고 다시 피다

덕수궁 돈덕전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칭경(稱慶, 축하의 의미)예식을 하기 위해 서양식 연회장 용도로 지어졌다. 이후 고종을 만나기 위한 대기 장소나 외국사신 접견 장소, 국빈급 외국인 방문 시 숙소 등으로 활용됐다.

1907년에는 순종이 즉위하는 곳으로 사용됐으나, 순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는 덕수궁 공원화 사업으로 훼철됐고 아동 유원지로 활용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재 복원 공사가 한창인 돈덕전이 1902년 이곳에 자리를 잡기 전 근처에 먼저 들어선 건물들이 있었으니 바로 1883년 5월 자리 잡은 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저)이다. 1884년 4월에는 영국공사관이 들어섰으며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후 1885년 10월에 정동에 개설한 구(舊) 러시아공사관(당시 영사관)의 정식 건물을 짓기 위해 1890년 8월 그 자리에 초석을 놓았다. 바로 이 러시아공사관이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피신해 있던 곳 즉 아관파천의 장소다. 1885년 12월 조선의 총해관(總海關)이 미국공사관과 영국공관 사이로 이전해 왔으며, 총해관장 관사가 있던 자리가 바로 돈덕전이 세워진 곳이다.

돈덕전은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로 건물 외벽 곳곳에는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조성돼 있었다. 돈덕전 외관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건물 좌우에 원뿔(고깔) 형태로 올라간 건축 구조가 특이하다.

문화재청에 의하면 올해 복원을 마칠 돈덕전은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2300㎡의 규모로 내부는 대한제국 자료관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덕수궁지도’. 돈덕전이 실선으로 표시돼 있다. 이는 이미 훼철되고 없음을 알려준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15
‘덕수궁지도’. 돈덕전이 실선으로 표시돼 있다. 이는 이미 훼철되고 없음을 알려준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15

일제의 덕수궁 공원화 사업으로 우리의 궁궐이 훼철된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이유 외에도 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저)과 영국공사관 사이의 도로 확장을 위해, 혹은 정구장을 만들기 위해 등 돈덕전 훼철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외력에 의해 궁궐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훼손되고 왜곡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기록에 의하면 1920년 현재의 덕수궁과 미국대사관 사이에 담장 길이 조성되면서 덕수궁은 둘로 쪼개졌고, 조선왕조의 근원인 선원전 영역은 총독의 손에 넘어가 조선저축은행 등에 매각됐다.

선원전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기 전 가장 먼저 신축했던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1900년 10월 화재로 소실되자 당시 미국공사관 북쪽 수어청자리(정동부지, 옛 경기여고 터)로 옮겨 1901년 7월 복원됐다. 이도 잠시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후 모두 훼철돼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가 해체되기도 했다.

돈덕전이 언제 훼철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920년대 들어 일제에 의해 훼철됐다는 주장과 1933년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철거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유가 어떻게 됐든 간에 한 나라의 상징인 궁궐을 훼철시킨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54년 6월 10일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서 발행된 ‘왕궁사(王宮史, 저자 이철원)’ 안에 실린 ‘덕수궁지도’를 살펴보면 ‘돈덕전’을 실선으로 처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지도가 언제 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작 당시 이미 돈덕전은 훼철되고 사라진 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도를 보면 돈덕전 외에도 많은 부분이 훼철됐음을 알 수 있다.

 

‘덕수궁평면도’. 돈덕전에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그려져 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15
‘덕수궁평면도’. 돈덕전에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그려져 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15

1910년 2월 제작된 ‘덕수궁평면도(1:4800)’를 보면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돈덕전에만 조선왕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도형으로 크게 표시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돈덕전은 덕수궁 내 중요한 건물이었으며, 대한제국이 황제국이자 자주국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알기에 일제는 여러 이유를 들어 이 건물을 재빠르게 철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덕수궁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의 야욕 앞에 조선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주국임을 상징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비운의 장소(중명전)이다.

2021년 복원이 완료될 돈덕전. 당시의 설계도 등 참고할 자료가 많지 않아 복원이 아닌 ‘재건’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기록이 없다는 것 또한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한 일제의 야비한 술책 중 하나였지 않겠는가. 비록 자료난 빈약하다고 하나, 그 자료에 의지하지 않고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돈덕전 안에 있던 우물이다.

 

돈덕전 안에 있는 유일한 우물이지만 이것을 우물로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우물 안의 나무는 원 밑동은 잘라진 채 그 가지가 자라난 것으로 마치 강제로 진행된 고종의 양위 후 순종이 왕위에 오른 역사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언덕진 뒤쪽으로 보이는 담이 영국대사관 사이의 돌담이다. 돈덕전이 훼철될 때 이곳에 그 잔해가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15
돈덕전 안에 있는 유일한 우물이지만 이것을 우물로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우물 안의 나무는 원 밑동은 잘라진 채 그 가지가 자라난 것으로 마치 강제로 진행된 고종의 양위 후 순종이 왕위에 오른 역사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언덕진 뒤쪽으로 보이는 담이 영국대사관 사이의 돌담이다. 돈덕전이 훼철될 때 이곳에 그 잔해가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1.15

궁궐 내 식수원이었고, 돈덕전 훼철의 수난 가운데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우물이었지만 방치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당시 우물이었던 곳엔 언제 떨어져 자랐는지 모를 나무 두 그루만이 시대의 아픔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나마도 나무 한 그루는 잘라져 그루터기만 남아있는 모습이 일제의 강요로 왕위를 양위할 수밖에 없었던 고종과 순종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해 더욱 쓸쓸해보였다.

과연 돈덕전 복원이 완료된 시점에서 ‘우물’은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또한 얼마나 많은 고증을 거치고 정성을 들여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했는지에 관심이 간다.

비록 당시의 완벽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다시금 태어나는 돈덕전을 통해 100여 년 전 을사늑약 당시 무참히 꺾여 짓밟혔던 오얏꽃이 다시 한번 활짝 피어나길 기대해본다.

역사를 바로잡아 가는 그 길, 길을 잃고 헤매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는 환지본처(還至本處), 만물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그 길이 또한 진정한 광복을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복원 중인 덕수궁 돈덕전의 모습. ⓒ천지일보 2021.1.15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복원 중인 덕수궁 돈덕전의 모습. ⓒ천지일보 20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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